3월 22, 2010

사순절의 끄트머리에서 부활을 기다리며

오래된 글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5)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하신 모든 가르침들과 비유들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과해야 이해될 수 있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비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22). 잘 알다시피 예수님은 당신이 장로와 대제사장들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세 번에 걸쳐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신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걸 이해하지도 못할뿐더러 두려워했다. 이해를 못했다는 것과 두려워했다는 것을 함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부활’이라는 것은 사실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것, 사람의 마음에는 결코 떠오를 수 없는 것이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8-10). 물론 뭐 육신이 죽었다가 소생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세계 각 민족의 전설에 널려있으나, 하나님의 율법으로 ‘정죄’를 받아 죽은 자가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결코 생각할 수 없다. 유대교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니까 부활을 겪기 전까지 예수님이 자기 죽으실 것, 부활하실 것을 아무리 이야기해봐야 제자들이 이해할 리 만무하다. 이 지점에서, 아무리 제자들이라 해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관계없거나 적대적인 사람들과 달랐던 지점이 있긴 하다. 그들의 생명과 예수님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명운에 그들의 명운 역시 달려있었다. 예수님이 흥하면 그들도 흥하고 예수님이 망하면 그들도 망한다. 자신들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건, 한마디로 말하면 판돈 탕탕 털어서 (자기 목숨까지도) 예수님께 베팅한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자기들끼리 김칫국 미리 마시고 감투 다툼하고 예수님이 자기가 고난 받는다 했을 때 뜯어말리고 한 건, 사람들이 비난하듯 이 사람들이 엄청 속 좁고 속물이라 그런 게 아니라 당연한 거라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 좇았으니까.

그러나 예수님 말씀 이해하는 관건은 예수님께 대해 얼마나 열심이 특심한지에 있는 게 아니다. 제자들이나 예수님 비난하는 자들이나 ‘땅과 육신’을 기준으로 생명과 사망을 나누는 데 있어서는 똑같았다. 제자들도, 바리새인, 서기관, 열심당도 모두 땅 위의 예루살렘과 다윗왕조의 재건을 통해 ‘이스라엘 나라가 언제 회복되는지’에 관심이 있었다는 데서는 같았다. 그리고 이런 거창한 대의명분 이전에 궁극적인 것은, 개개인과 사회의 생존이다. 메시아라도 땅과 육신의 생존과 번성을 지지하지 않으면 그는 메시아일 수 없는 것이다.

제자들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서로 싸우지만 어쨌든 땅과 육신의 현실을 예수님을 통해 긍정하고 세우고자 하는 욕망은 똑같았다. 제자들도 기적과 치유를 베푸는 예수님을 통해 자기들에게 한 자리 줄 수 있는 임금을 보았고 바리새인들도 그런 예수님을 통해 이스라엘을 옛적같이 회복시키는 임금을 보았던 것이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 사두개인들, 헤롯당원들 등이 예수님을 집적대는 게 나오는데, 이게 바로 마귀시험과 똑같은 종류의 시험이라 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 아들임을, 메시아임을 증명하라. 어떻게? 돌을 떡으로 만들고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안 죽는 능력을 보이고 천하만국의 영광과 권세를 가져옴으로.’ 예수님이 율법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인지 증명할 수 있는 표적과 이적을 이들은 끊임없이 요구했다. 사실 이러한 이들의 요구는 이들의 이해 틀 안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각 당파들이 세부적인 내용이나 방법론은 달랐지만 땅의 영광을 구하고 육신적인 번성을 추구한다는 면에서는 한결같았다. 복음서에 나오는 ‘무리’, 혹은 ‘민중’ 역시 동일한 이해 틀 안에 있었다. 돈을 주고 빵을 주는 메시아. 오병이어의 기적 역시 민중이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복음서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이들이 생각하고 염원한 그리스도상을 예수님은 항상 배반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15). 그런 임금 자리, 그리스도 자리에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항상 부인했다. 나는 그런 임금일 수 없다, 나는 그런 그리스도일 수 없다 그거다. 반대로, 세상에 의해 정죄받은 자리에서는 자기를 ‘왕’이라 하신다.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마 27:11-12). 예수님에 대한 메시아적 기대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할 때 극에 달했지만, 계속 거듭되는 예수님의 뻘짓(나는 그런 그리스도가 아니다)과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의 선동(예수는 율법을 범하고 성전을 허문다는 참람한 말을 하는 자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일 수 없다, 기대 접어라, 그러니까 너희가 기대하는 꿈을 이뤄주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 저주만 초래하는 자다, 라는 식의 흐름을 탔을 것이다)으로 인해 민중(여론)은 급기야 반등한다. ‘호산나’를 외치던 무리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소리 지르게 된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율법으로’ 정죄하여 못 박았다. 자기들의 그리스도상에 부합하지 않는 예수에 대한 낙담과 배신감에 치를 떨며 말이다. 차라리 강도 바라바가 더 그리스도상에 부합했다(그에게는 무장봉기를 할 수 있는 일말의 잠재성이라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정죄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리스도를 살리셨다. 이제 그들이 그리던 그리스도가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혀 버린 형국이 되었다.

예수님 십자가 명패가 ‘유대인의 왕’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유대인의 왕’, 그들 마음속에 있던 탐심의 그리스도를 못 박아버리신 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고 간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런 그들의 탐심과 그들 안에 들어있던 그리스도(=적그리스도)다. [이 ‘안티크리스토스’에서 ‘안티’은 ‘적(敵)’보다는 ‘대체(代替)’가 더 의미에 부합한다. 적그리스도라기보다는 ‘그리스도 대체제’, 내지는 ‘짝퉁 그리스도’가 지금 우리말에 더 부합한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죄’가 되셨던 것이다. 그 자리에 달려 하나님의 정죄를 받아야 할 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사실은 적그리스도, 유대인의 왕이며… 적그리스도와 유대인의 왕을 염원하는 모든 마음들이다. 그러나 무죄하고 의로우신 예수님께서 ‘죄’가 되셔서 십자가 저주의 자리에 대신 달려 죽으셨다. [하나님의 율법조차 이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율법은, 땅과 육신의 생존과 번성을 위해 율법을 해설하는 무리들에 의해 예수님을 저주하고 정죄하여 나무에 달게 하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율법은 이 ‘육신의 약함’을 결코 이길 수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유대인들이 이랬다면… 이방인들은? 뭐, 말할 필요도 없다. 이방인 중 최고의 문명을 구가하던 로마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뫼시고 십자가를 면하게 해주었는가? 어림없다. 십자가형은 엄연한 로마제국의 형벌이지 않은가?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이방인들, 로마)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리에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모든 육체는 죄 아래 있다, 죄인이라는 사실이 이로써 명백히 확증된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9).

이런 모든 사실이 부활 후에 깨달아진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의롭다 손들어준 사건인 부활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드러나지 않고 영원히 밝혀지지 않은 비밀로 남았을 것이다.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골 5:2~3). 그러나 하나님은 일향 미쁘사 당신에게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손을 들어주사 예수님을 못박은 세상을 정죄(심판, 판단)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 마음의 전모를 보지 못했던 부활 전 시기에 어느 육체가 이것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제자들이라고 예외였을까? 자기들은 육신을 안 가졌나? 육신을 가지고 있지만 부활을 보지 못한 자들은 필연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리에 설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회개(돌이킴)’가 뭔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회개는 우선, 자기가 그리스도를 못 박은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시인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인, 내 안에는 그리스도를 못 박을 수밖에 없는 탐심과 죄가 있다, 이제 그 자리를 벗어나서 그리스도쪽으로 돌이키겠다 하고 실제로 돌이키는 게 회개다. 돌이키면 어디로 가느냐? 십자가다. 십자가에 못 박느냐, 못 박히느냐 이 두 개밖에 선택지가 없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회개의 결과는 그리스도의(와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처럼’ 세상의 미움을 받게 되어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 못 박히게 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렇게 내가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곧 세상이 내게 대해 못 박히는 것이다. 이미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의 판단이 시퍼렇게 날이 서있다. 그리스도를 의롭다 판단하시고 살리신 하나님은 우리와 세상 사이에 동일한 판단을 내리실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죽은 자들만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다. 너희가 세례(=십자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복음서에서 하신 거의 모든 말씀들은 잘 알다시피 시간적으로는 ‘십자가 전’에 하신 말씀들이다. 이 모든 말씀들은 실상 듣는 자리가 딱 두 자리밖에 없다. ‘십자가 후’, 즉 십자가와 부활을 통과한 자리, 아니면 십자가와 부활을 모르는, ‘십자가 전’의 자리.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고 함께 부활한 자리, 아니면 십자가에 그리스도를 못 박는 자리’다. 복음서, 아니 전 성경의 모든 말씀과 비유는 십자가를 대입시키지 않고 보면 반드시 육신적으로 풀게 되어있고… 이렇게 되면 실상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보이는 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십자가 전의 자리에서 들은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무리들은… 결국 예수님을 못박는 자리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니까 누구든 예수님 말씀 앞에서 이 두 자리 중 한 자리를 선택해야 한다. 비록 예전에 예수님을 못 박는 자리에 있었다 하더라도 회개하여 못 박히는 자리에서 예수님 말씀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설교자라면… 참으로 하나님 말씀을 맡은 자요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리는 자라 자처한다면… 반드시 ‘십자가 후’의 자리에서 말씀을 풀어야 하고 교인들을 그리로 이끌어야 할 것이다. 당시 제자들이 어떤 상태에 있었느냐, 구원을 받았느냐 하는 문제는 사실 뭐 중요하지 않다. 지금 듣는 우리가 어떤 상태냐, 어디서 듣고 있느냐, 이게 관건 아니겠는가? 당시 제자들의 상태가 어떠하느냐에 따라 말씀에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듣는 자들의 상태와 별개로 존재하고 주어지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