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06, 2010

세속적 통치와 영적 통치

오래된 글

오늘 학교에서 책을 좀 보다가 우연히 재세례파의 선교에 대한 글들이 얼핏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는 별로 그런 생각을 못했는데, 가만히 보니 내가 교회에 대해 말하고 있는 내용들이 재세례파적인 관점이라 오해받기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 입장은 개혁파인데 말이다. 시대가 하수상하여, 교회와 세상을 구분해서 생각하자, 이런 말만 해도 재세례파 내지는 루터파 두 왕국론이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그런데 교회와 세속적 기구, 예를 들면 국가를 정확히 구분하는 버릇은 개혁파의 핵심 중 핵심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 4권 20장에서 그냥 보면 루터의 두 왕국론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의 ‘두 통치론’을 풀어놓았다. 예를 들면 다음을 보자.

우선 문제 자체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앞에서 한 구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서로 성질이 완전히 다른 이 두 가지를 혼동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우리는 그런 어리석은 혼동을 피해야 한다. 복음은 자유를 약속하며 이 자유는 사람들 사이에 어떤 왕이나 집권자를 인정하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우러러본다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 위에 어떤 권력이 군림하는 동안은 자유의 혜택을 입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전 세계를 새로운 형태로 개조해서, 법원이나 법률이나 집권자나 자유를 속박한다고 그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몸과 영혼을 구별하며 덧없는 현세와 영원한 내세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과 세속적인 지배권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 세상의 초보적인 제도에서 찾으며 거기에 한정하려는 것은 유대적인 허망한 생각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은 영적인 결실이며, 이 영적 결실은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되고 부여되는 자유는 전적으로 그 자체의 한계 내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자.1)

교회와 세속을 구분하는 소리를 조금만 해도 재세례파 혹은 루터파라는 식의 이야기를 듣는데, 사실 재세례파와 루터파는 전혀 다른 스탠스를 가지고 있다. 물론 개혁파 역시 양자에 대해 그렇고. 간략하게 개혁파, 루터파, 재세례파의 대립점과 일치점을 함 정리해보자.2)

루터파와 개혁파는 국가를 하나님이 제정하신 기구라고 보는 데서 일치한다. 그러나 루터파는 세속의 통치가 교회에까지 개입하는 것을 허용한다. 조금 도식화해서 말하자면, 모든 실증적인 힘의 행사를 세속적 통치에 맡기고 영적인 통치는 그야말로 ‘영적인’ 영역으로 환원시킨다.

재세례파는 루터파와 개혁파와는 달리 국가를, 좀 과격한 입장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권세’로, 좀 덜 과격한 입장은 ‘필요악’으로 본다. 좀 덜 과격한 입장에서 국가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기구’라고 말할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유보적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매우 상반된 두 가지 대처가 나온다. 우선, 하나님께 대항하는 권세니까 뒤엎자, 이런 폭력적 대처가 있다. 다른 하나는 국가의 폭력성을 하나님께 대항하는 권세의 핵심이라고 강조한 뒤, 그러니까 모든 폭력을 그치자, 즉 비폭력 평화주의를 주장하게 된다. 알다시피 재세례파의 역사는 후자의 견해가 더 설득력을 얻었고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스림을 신약을 카논으로 삼아 일원화시키는 것은 양자 모두에 공통적이다. 신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다스림의 요체를 비폭력 평화주의로 보느냐, 아니면 신약적 공동체의 전면적인 시행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대처가 달라지는 것이다. 후자가 극대화되면 ‘천년왕국운동’이나 ‘반문명공동체 형성’ 같은 현상들로 나타난다.3)

개혁파와 재세례파가 일치하는 부분은 교회 내에 세속적 통치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충분히 강조되어야 한다. 개혁파들이 재세례파를 논박했지만 세속의 다스림과 세속의 원리가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는 격하게 반응했다. 이것은 대륙 경건주의와 영국 청교도주의 모두를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다. 나쁘게는 목사들이 반정부 선동가로 불릴 정도로 국가의 통치에 대해 반항적인 경우들이 있었다.

루터파와 재세례파가 일치하는 부분은 사실 거의 없다. 통속적인 이해와 달리, 위에서 설명했듯이 루터의 두 왕국론과 재세례파의 국가관은 전혀 궤를 달리한다. 단, 비폭력 평화주의의 입장에 선 재세례파일 경우 전략의 형태가 루터파와 표면적으로 비슷하게 보일 수는 있다. 비폭력으로 폭력을 이기려하는 평화주의가 취하는 국가에 대한 태도는 모든 실증적 권세를 국가에 위임한 루터파가 취하는 그것과 비슷한 양상일 수 있다. 그러함에도 양자의 뿌리는 전혀 다르다.

나는 세속적 통치가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는 데 대해 재세례파를 거슬러, 동의한다. 그러나 개별적인 권세가 하나님이 정하신 권세가 아니라 권세의 자리,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는 것이라 본다. 이러한 내 입장은 전통적인 개혁파의 입장과 일치한다. 만약 어느 권세가 세속적 선악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작동하고 있는 권세다. 그러므로 권세에 대한 평가는 항상 유보적이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OOO 대통령은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말하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개혁파적 어법이 아니다. 되도록 두루뭉술하게 말해야 한다. 권세자 개인 뿐만 아니라 당대의 권세 체계 내지는 시스템조차 항상 유보적인 자세로 대해야 한다. 이건 바울에게서도 역시 발견된다 ―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다. 그러함에도 예수님은 모든 정사와 권세를 폐하시는 분이다. 개별 권세자, 개별 권세 체계에 대해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말을 적용하는 것은 기껏해야 수사적인 활용일 뿐이다.

이러한 권세는, 내가 예전에도 썼지만, 창조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그렇게 생겨 먹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영생에 이를 수 있었다. 권세는 심판에 근거하고 심판은 선악을 가르는 행위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말씀을 주셨고 이 말씀에 의해 선악은 전제되어있다. 이렇게 말씀까지 내포하는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인 것이다. 심지어, 사람이 딴살림 차려 육신에서 비롯되는 선악체계를 갖추었을 때(=선악과 명령 어겼을 때)조차 권세가 없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본래 권세가 존재했다. 따라서 영적 통치나 세속적 통치는 모두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 통치가 같은 평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세속적 통치에 대해 지나치게 ‘신적 기원’ 운운하는 것은 세속 통치를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복음’과 (보편 윤리의 차원으로 해석된) ‘율법’은 다같이 하나님이 정하신 바지만, 플롯 내에서의 위치는 분명 다르다. 이건 내 입장인데, 사실 이 부분이 개혁파 내에서도 가장 스펙트럼이 다양한 부분이다. 어쨌든, 나는 세속적 통치를 영적 통치와 같은 ‘해석학적’ 평면에 두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분명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시면서 기존 유대인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 그리고 로마의 세속적 통치 모두를 부인했다. 게다가, 복음서를 자세히 보면 ‘로마의 세속적 통치=당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세상’이라는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4)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세속적 통치를 ‘칼로’ 무너뜨리셨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십자가로’, 즉 ‘영적으로’ 무너뜨리신 것이다.5)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세속적 통치를 무너뜨림으로써 드러난다. 모든 세속적인 통치들은 분명 하나님이 정하신 바지만,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세속적 통치를 (육적으로가 아닌) 영적으로 무너뜨림으로써 비로소 드러난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고 해서 육체를 가진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스스로의 육체를 무너뜨리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여셨다. 성육신은 유비가 아니다. 성육신은 아바타가 될 수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 통치는 양면이 있거나 두 영역이 있다고 말하기보다는 전체로서 하나의 의미로 드러난다고 보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한다. 서사적(敍事的)이기 보다는 서술적(敍述的)이다.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세상 가운데서 살기에 세속적 통치를 거부할 수 없다. 숱한 관계망들과 접촉점들이 삶에는 존재한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이런 것들에서 면제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공유하고 사는 육신들은 모두 당대 자기가 속한 사회의 도덕적, 법적, 관습적 통제를 받는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라 해도 룰이 있고 권세가 있다. 개혁자들은 모세 율법을 일종의 ‘보편 도덕법’으로도 보았는데, 이것은 서양의 특수상황이라 할 수 있다. 서양은 우리나라 같은 이방과 달리, 성경 말씀의 문자들이 도덕과 관습과 법으로 기능한 나라다. 우리나라의 유교 같은 지위를 감당한 게 성경 말씀이다. 그러므로 세속적 통치와 영적인 통치가 지속적으로 헷갈려왔던 것이다. 게다가 모세 율법의 많은 부분들이 실제로 보편적 도덕에 일치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가나안’이라는 구체적인 물적 현실 가운데서 선포된 것이 율법이기 때문이다.6)

그러므로 교회라는, 안과 밖의 경계가 있는 무리로 모인다는 것은 보편 윤리를 위함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보편 윤리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함에도 교회는 윤리적 대안이나 보편 윤리의 전위 세력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몸으로 드러나야 한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완결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충만한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난 교회를 일종의 ‘대안공동체’로 간주하는, 재세례파식의 관점에도 반대한다. 교회의 사명은 직접 세상을 바꾸든, 아니면 모범을 보여 세상을 바꾸든, 어떤 방식으로든 타자인 세상을 개선하는 무리가 아니다. 교회는 이전에는 전적 타자였던, 세상에 속했던 사람들을 이제는 형제로, 내부인으로 받아들인다. 타자인 세상을 타자로 그대로 두고 개선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내부화시킨다. 교회에 속해있는 ‘사람들’은 동시에 세상에도 거하기에, 세속적 권세에도 복종해야한다. 일반적인 선악 체계에서 선한 일들을 도모하는 것을 교회는 막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 다니면서 보편 윤리를 저해하는 것이 금지된다. 여기에는 단순히 ‘나쁜 짓은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나쁜 짓을 하는 것이 복음을 가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 근본적이다.

그리스도인 개인은 여러 정치적 지향, 인생관 등을 자유롭게 택하여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이 분명 이러한 선택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일종의 ‘윤리’가 발생할 수는 있다. 이러한 윤리가 비로소 유비적이다. 육신의 부모도 제대로 못 모시는 사람이 하물며 하늘 아버지를 모시랴,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을 안다는 사람이 어떻게 부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가난한 자를 멸시하랴, 원수인 우리를 사랑하신 성부와 성자를 아는 자들이 어찌 이웃을 선대하지 않으랴 등등. 현금의 상황 하에서 교회는 거대해진 맘몬, 즉 자본에, 그리고 동시에 복수와 한(恨)을 기반으로 한 전체주의에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유비적 일관성이 있다. 그러함에도 교회 자체가 특정 지향의 윤리나 이데올로기를 위한 전위 조직으로 나서거나 특정 (이익) 사업 내지는 결사(結社)의 주체로 나서는 것은 교회의 교회됨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뜻이 있는 사람은 기존의 조직에 참여하거나 아니면 따로 만들면 된다. 그리스도인들 내지는 그리스도인 일반을 정치 세력화하는 것은 항상 신중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교회를 정치 세력화하는 것은 없어야 한다. 그러함에도 분명한 것은 개별 그리스도인은 교인인 동시에 당대의 시민이라는 사실이다. 자기가 속해있는 사회의 권세에 대해 민감해야하고 사회에 선악이 분명히 설 수 있도록 노력해야한다. 하나님의 다스림이7) ‘유비적으로’ 나타나도록 애써야 한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반복된 말이긴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이 잘 굴러가도록, 선을 향해 나아가도록 교회 말고 다른 여러 권세들을 정해놓으셨다는 사실이다. 국가라는 권세에 속하든, 비제도권의 도덕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나오는 권세에 속하든 이것들을 교회화시키거나 교회를 이것들 중 하나로 만드는 시도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8) 세속 권세가 교회를 삼키는 것도, 교회가 세속 권세를 좌지우지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교회 양자에 삼투되지만, 이 양자는 결코 서로 섞일 수 없다. 그러함에도 양자는 모두 하나님이 정하신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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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충호 역, 20장 1항. ↖︎
  2. 여기서 ‘해석학적’인 전제를 하고 넘어가자면, 난 16세기 맥락에서 국가는 모든 세속적 통치(내지는 ‘영역들’이라고 해도 무관하겠다)에 대한 제유(提喩)로 본다. ↖︎
  3. 지금까지도 이들의 유산은 남아있다. 교회를 이른바 ‘신약교회’라 규정하는 사람들은 재세례파의 성경독법을 따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4. 이것은 단순히 ‘악한’ 세상에 국한되는가? 그렇지 않다. 로마나 유다가 똑같이 윤리적으로 악했기 때문에 동일시되었던 것이 아니다. ↖︎
  5. 여기서 십자가가 왜 ‘영적’이냐 하면서 ‘이원론’ 운운할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누가 이원론인가? 소위 ‘영적 세계’를 ‘영적’, 그리고 물리적 세계를 ‘육적’이라고 말하는 건 성경적 어법이 아니다. ‘더러운 영들’은 영적 존재가 아니라 육적 존재고 부활한 (물리적) 몸은 육적인 게 아니라 영적이다. 하나님 나라 말고는 소위 ‘영적’ 세계들조차 모두 ‘육적’인 것으로 보는 게 성경이다. 존재론적 차원에서 성경은 애초에 일원론이다. 스스로 그리스적 이원론에 갇혀있으면서 이 이원론을 일원화시켜놓고 이걸 일원론이라 하며 이원론을 극복했다고 여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는 ‘영적’인 공동체고 세속의 통치는 ‘육적’이다. 십자가 역시 영적인 사건이지 육적인 사건이 아니다. 더 설명하려면 별도의 글이 필요하므로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다. ↖︎
  6. 작금의 기독교 윤리학들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성경에서 추출해낸 여러 선한 아이디어들은 사실 굳이 성경을 통하지 않고서라도 도출될 수 있는 것들이며 그다지 새로운 것들은 없다. 물론, 내 지식이 짧아서 예단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거의 대부분의 기독교 윤리학들은 재세례파 윤리학 말고는, 굳이 앞에 ‘기독교’라는 수식을 빼도 좋을 만큼, ‘기독교’ 사회를 넘어서는 보편성을 지닌 윤리학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런 윤리학들은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뿌리가 서양인데(난 여기서 인종주의적 발언을 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서양은 기독교가 윤리의 카논으로 작동해온 유구한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발전을 뭐라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런 역사가 이미 ‘우리’의 역사적 사회적 조건으로 착종되어있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야 윤리학을 도외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함에도, 일단 모든 것을 제쳐두고 본다면, 비서양인 우리 입장에서 창조 세계에 공통된 선악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성경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나오는 것이 과연 적실한지에 대해서 나는 일말의 회의가 있다. 그저 삶 그 자체에서 출발하면 안 되는지. 굳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도 따라야 할 여러 규범과 상황과 현실 등등에서 시작하면 안 되는지. 윤리의 근원을 ‘종교’로 본다면, 기독교를 ‘종교’라고 보편화시킨 근거를 물어야하고, 종교 말고도 윤리의 근원을 가지고 잘 살고 있는 여러 사회들의 존재를 지적해야 한다. 내 지식이 짧아 나이브한 서술들을 쏟아놓았지만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는 알 것이다. ↖︎
  7. 그러고 싶다면 이미 통용되는 용어인 ‘주권(主權)’으로 바꿔 불러도 무방하다. 그러나 나는 성경에 나타나는 다스림, 통치 등의 단어의 직접적인 뜻에 더 머물고자 한다. ↖︎
  8. 그러고 싶다면 기존의 ‘영역 주권설’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나는 소위 영역들의 (역사적) 임의성에 주목하고, 그것을 절대화하지 않으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