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7, 2010

≪긍정의 힘≫을 읽고

오래된 글

테제 13. 자유의지는 죄[를 지은] 이후에는 이름으로만 존재한다. 자유의지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행한다면, 그것은 죽을죄를 짓는 것이 된다(Liberum arbitrium post peccatum res est de solo titulo, et dum facit quod in se est, peccat mortaliter).
테제 14. 자유의지는 죄[를 지은] 이후에는 선을 주체적 능력 차원에서만 지향할 수 있지만, 악은 항상 능동적 능력 차원에서 지향한다(Liberum arbitrium post peccatum potest in bonum potentia subiectiva, in malum vero activa semper).
테제 15. 능동적 능력 차원에서는 자유의지가 무죄 상태에 있을 수도 없고 선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오직 주체적 능력 차원에서만 [이 두 상태가] 가능하다(Nec in statu innocentiae potuit stare activa, sed subiectiva potentia, nedum in bonum proficere).
테제 16. 자기 안에 있는 것이 행하여져 은혜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죄에 죄를 더한 것이 되기에 배나 죄인(빚진 자)이다(Homo putans, se ad gratiam velle pervenire faciendo quod est in se, peccatum addit peccato, ut duplo reus fiat).

목사 안수를 받을 즈음해서 조엘 오스틴 목사의 ≪긍정의 힘≫을 읽었다. 워낙 유명한 책이고, ‘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읽어보니, 조용기 목사의 위대한 베스트셀러 ≪4차원의 영성≫에서 이미 제시한 내용을 틀만 약간 바꾸어 제시한 것이라 파악이 되었다. 사실 우리의 ‘용기 조’ 목사님은 전세계적인 명망을 가지고 계시다. 여기 네덜란드에도 위의 책은 진작 번역되어, 종교서적 분야에서 여전히 잘 팔리고 있는 책 중 하나에 속한다.

≪긍정의 힘≫ 원서 제목은 ‘Your Best Life Now’인데, 이걸 '긍정의 힘'이라고, 참 묘하게 번역해놓았다. 나로서는 이게, ‘theologia positiva’하고 겹쳐지는 걸 피할 수 없고, 좀 더 나아가서는 ‘theologia gloriae’와 겹쳐진다. 루터가 당대의 신학을 ‘영광의 신학’이라 비판하며 치고 나왔는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당대 신학의 포지티브한 내용 · 자세를 주로 비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현금 한국의 교계에서 ‘긍정’의 어감은 ‘할 수 있~다’와 상통하는 바가 있고, 이는 라틴어도 비슷하다 ― positiva, possum(물론 이 두 단어는 전혀 다른 말에서 파생되었다).

위에서 인용한 문구들은 루터의 <하이델베르크 토론> 중 테제 13, 14, 15, 16이다. 여기서 비판되는 게 공교롭게도 ‘할 수 있~다’인데, ‘할 수 있~다’의 주체인 자유의지와, 그 자유의지의 ‘할 수 있음[possum]’이 기각되고 있는 것이다.

≪4차원의 영성≫이나 ≪긍정의 힘≫에서 관건인 것은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스러운 것들’을 잘 활성화시키고 발현시키는 것이다. ≪4차원의 영성≫에서 이 ‘하나님스러운 것’은 ‘4차원의 영적세계’로 요약이 되며 이것은 생각, 믿음, 꿈, 말이라는 방편으로써 활성화된다. 이 모든 방편들은 자기 안에 있고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긍정의 힘≫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와 ‘자기 안’이라는 경계조차 허물어버린다. ‘나’가 바로 ‘하나님스러운 것’이다. 이 ‘나’에서 비전이 나오고 가치가 발견되고 생각과 말의 힘이 생성된다. 그리고 두 책 모두에 있어서 하나님스러운 것을 활성화시키는 것은 (자기/나의) ‘선택’이다. 4차원의 영적세계를 선택하라, 잘되는 나를 선택하라!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루터가 말한 것과 정확히 상극(相剋)을 이룬다. 위 테제 13~15를 살펴보자.

이 부분은 중요한데, 좀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일단, ‘주체적 능력[potentia subiectiva]’부터 설명해보자. 이것은 ‘객체적 능력[potentia obiectiva]’과 한 짝인 단어다. 전자는 어느 개체에 ‘실제로’ 존재하는 능력을 의미하고 후자는 그 개체에 대하여-있는-능력, 즉 아직까지 그 개체에 대해 가능성 내지는 본질로 존재하는 능력을 말한다. 전자는 또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바로 ‘능동적 능력[potentia activa]’과 ‘수동적 능력[potentia passiva]’이다. 전자는 개체의 ‘행위’에 해당하고 후자는 개체의 형상[forma], 즉 개체가 궁극적인 목적을 지향하게 하는 개체에 내장된 능력이다.1)

루터는 테제 14, 15에서 ‘주체적’ 능력과 ‘능동적’ 능력을 대비해서 썼다. 얼핏 보면 짝이 맞지 않는 이 사용법을 통해 루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나 선을 택하는 쪽으로는 ‘활성화’되어있지 않다. 즉 죽어있다. 악을 택하는 쪽으로는 항상 ‘활성화’되어있다.” 이것은 루터가 테제 14의 증명에서 비유로 아주 잘 설명해놓았다 ― “이것은 마치 죽은 사람이 생명을 단지 주체적 차원에서만 지향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가 살아있을 때는 죽음을 능동적으로 지향할 수 있다.” ‘죽은 사람이 생명을 주체적 차원에서 지향한다’는 말은, ‘죽은 사람에게도 살아날 수 있는 능력이 실제로 존재한다’라고 풀어볼 수 있다.

루터는 바로 이어지는 내용에서 자유의지는 죽어있다고 말하면서 그 근거로서 주님이 부활시킨 사람들의 존재를 들고 있다. 어떤 죽은 사람도 스스로 살아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사람에게는 ‘다시 살아남을 선택하는 가능성/능력’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반증이 바로 주님으로 말미암은 부활이다. 그들에게 다시 살아날 능력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실제로’ 다시 살아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살아났다. 그러므로 ‘살아있을 때 죽음을 능동적으로 지향할 수 있다’는 말은 ‘죽음을 선택할 능력’이 ‘활성화’되어있음을 의미한다 ― 살아있는 누구나 자살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죽어있을 때에는 다시 살아남을 선택할 능력이 죽어있다. 그러나 이 능력이 죽어있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는 없다. 단지 ‘활성화’되지 않았을 뿐이다. 죽은 사람은 생명을 주체적 차원에서 지향하지만 실제 생명을 취하는 것은 오직 자기 밖에서 오는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이 글에서 ‘Liberum arbitrium’을 ‘자유의지’로 번역했다. 하지만 이것은 ‘의지의 자유선택’ 내지는 ‘자유롭게 선택하는 능력/가능성’이라고 풀어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라는 표현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이상에서 볼 때, 이 비유에서 ‘죽은 사람=자유의지’, ‘살아나는 것=선을 행함’, ‘주님의 살려주는 능력=은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있는 것이 행하여져 은혜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죄에 죄를 더한 것이 되기에 배나 죄인(빚진 자)이다(테제 16). 자기 안에서 모든 것을 구하는 죄, 그리고 생수(은혜)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버린 죄.

이렇게 본다면, 지금 죄를 짓고 있는 사람 안에는 ‘하나님스러운 것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안에서 하나님스러운 것들을 발견하여 행하려는(누리려는, 취하려는, 선택하려는 등등) 사람은 ‘죄에 죄를 더한 것이 되기에 배나 죄인’인 자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구원받기 전에는 그랬지. 그런데 구원받은 후는 내 안에서 하나님스러운 것이 나오지 않나?’ 루터에게는 구원받은 전후의 구분이 없다. 내 안에서 하나님스러운 것들을 발견하여 행하려는 자는 구원의 확신이 있든 없든 모두 죽을 죄인들인 것이다.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죄를 짓지 않는가? 어떤 사람이 죄를 짓는 이상 그의 안에는 하나님스러운 것들을 선택할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어쩌라고? 그냥 죽을 죄인으로 살다가 저주받고 죽으라는 소리냐?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겸비케 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고자 하는 열심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다(테제 17).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기에 적합하게 되기 전에 인간은 자신에 대해 철저하게 절망하여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테제 18).

루터에게 있어서 절망은 은혜의 선봉이다. 이러한 절망은 ‘4차원의 영적세계’나 ‘잘되는 나’에서 위험스럽고 의심스러운 것으로 치부되어 적극적으로 추방되고 있는 그 무엇이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철저한 절망 없이는 은혜, 즉 하나님스러운 것들을 접하는 계기가 결코 임하지 않는다.

곧이어 루터는 ‘신학자[Theologus]’를 정의하고 있다. 알려진 하나님의-보이지-않는-것들을,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보는 사람은 신학자라 불릴 자격이 없다(테제 19). 보이게 된 하나님의-보이는-것들, 즉 하나님의 뒷모습들을,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 아는 자가 자격이 있다(테제 20). 영광의 신학자는 악을 선이라 선을 악이라 말하나 십자가의 신학자는 있는 그대로를 말한다(테제 21). 행위들 가운데서, 알려진 하나님의-보이지-않는-것들을 보는 지혜는 완전히 교만하고 눈멀었고 강퍅해져있다(테제 22).

여기서 ‘악’은 ‘영광스러운 것들’, 즉 ‘긍정적인 것들’이다. 자기 행위들, 선택들, 믿음들, 꿈들, 생각들, 말들 가운데서 하나님스러운 것들을 보는 지혜는 완전히 교만하고 눈멀었고 강퍅해져있다.

이상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4차원의 영성’이나 ‘잘되는 나’는 모두 ‘영광의 신학’에 속하며, 오스틴이나 조용기 목사는 적어도 루터가 말하는바 ‘신학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는 돌고 돌아 우리는 다시 원점에 서있다...


  1. 영어판 루터선집 중 나름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J. J. Pelikan, H. C. Oswald & H. T. Lehmann의 번역본에서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 “Free will, after the fall, has power to do good only in a passive capacity, but it can always do evil in an active capacity”(테제 14). “Nor could free will endure in a state of innocence, much less do good, in an active capacity, but only in its passive capacity”(테제 15). 그러나 ‘post peccatum’을 ‘타락 이후’라고 번역한 것은 논리의 비약이라고 나는 본다. 물론, 많은 번역본에서 이 부분을 ‘타락 이후’라고 번역해놓았다. 하지만, 루터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사람이 죄를 짓고 있다는 사태(事態)는 사람의 자유의지가 죄의 종이 되어있음을 나타내는 증상이다’이다. ‘타락 후에는 자유의지가 수동적으로만 선행(善行)할 수 있고 능동적으로는 못한다’가 아니다. 위 번역과 같은 능동-수동의 틀에서 말하려면 ‘타락 전후’가 아니라 ‘그리스도 전후’다(테제 27). 게다가 ‘potentia passiva’보다 상위개념인 ‘potentia subiectiva’를 ‘passive capacity’라고 번역하여 문자적으로 볼 때 마치 ‘potentia passiva’를 번역한 것 같아 보이게 했다. 이 번역을 설명해놓은 각주는 다음과 같다 ― “This is Luther’s way of stating that the free will could before the fall determine to do good. That it could do so alter the fall would seem likely because of its name, but not in actual fac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