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2, 2012

플라톤과 호메로스

플라톤은 ≪국가≫ 제 10권에서 '시인'을 무지 경계한다. 이는 시인에게 '힘'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라는 말 자체가 직역하면 '만드는 자'다. 그런데 이 시인의 힘의 본질은 시가 가진, 사람을 '매혹하는' 힘이다. 이게 시적 재미의 요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시라는 것은(단지 '운문'이라고 할 때 좁은 의미의 시 말고) 항상 이야기, 즉 어떤 특정한 현실을 구축하고 있다. 하나의 매트릭스, 하나의 세계가 바로 시인 것이다.

플라톤은 시의 이른바 '삼중 모방'에 방점을 찍으려 '침대' 등을 예를 들며 지질하게 논의를 전개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가 중심에 두고 비판하는 시인은 호메로스고, 알다시피 호메로스의 시는 거대하고 웅장한 현실을 구축하고 있다, '침대'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호메로스가 구축해놓은 현실, 그리고 그 현실이 전 헬라스 사람들에게 '대세'로서, 가장 인기 있는 현실로서 자리잡고 있는 상황에 대한 불만이 플라톤이 풀어내는 썰의 고갱이가 아닐까 한다. 그는 이런 상황을 결코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찾아낸 혹은 발명해낸 '이데아계'의 최대 경쟁자는 호메로스의 웅장한 서사시였던 것이다.

플라톤이 문제를 삼은 지점은, 내 생각에는,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기본적으로 '전쟁시'였다는 것일 게다. 베고, 찌르고, 때리고, 부수고... 훔치고, 속이고, 기습하고, 뒤통수치고... 이런 것들은 재미는 있고 웅장하기도 하지만 '통치'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이게 플라톤의 기본 문제의식이었으리라. 즉, 시는 통치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철학하는 사람, 즉 지혜를 찾고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세상의 '진짜 모습(=이데아)'을 관(觀)할 수 있으며, 이런 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의미심장한 부분은, 플라톤이 단지 호메로스의 서사시들을 조목조목 반박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는 오히려, 호메로스를 비롯한 시인들 전체, 그리고 시 전체를 문제삼고 있다. 그가 시 대신에 창조한 형식이 바로 그의 대화편들이다. 이 대화편들은 서사가 제공하는 재미 대신에 따지고 곱씹고 갈라내는 재미를 제공한다. 이 재미는, 솔직한 말로 시적 재미에 비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시인과 시를 매우 경계하는 것이다. 쎄가 빠지게 철학 공부시켜봤자, 헐리웃 영화 한 편이면 얼이 확 빠진다. '모방 범죄'는 항상 헐리웃 영화가 그 대상이지 않는가...! 시인은 '만드는 자'이고 시인이 만들어내는 것은, 침대 따위가 아니라, 하나의 현실이다. 현실을 구축해내는 힘, 이게 시인이 가진 힘의 본질이기에 이 힘은 통치하는 힘, 즉 '권력'으로 쉽게 치환되기도 하는 것이다, 특히 아테네 같이 민주정인 상황에서는. 따라서 '철학자-통치자'의 권력 투쟁 대상은 시인,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인-통치자'라 할 수 있다. 시인이든 철학자든, 권력을 잡으면, 서사든 이데아든 자기가 구축한 현실을 실제로 재현하려 들 것이므로. 플라톤식으로 본다면, 시인은 쉽게 소피스트와 동일시되고 민주정은 쉽게 중우정치와 겹쳐진다.

그러나 플라톤의 통치는 '극진한 자기 사랑'을 토대로 한다. 철학자의 기본 소양은, 지적 능력이 아니라, 자기의 영혼을 극진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영혼을 진 자리, 마른 자리를 골라 눕혀 고이 키우는 자가 바로 철학자다. 육체의 모든 더러움에서 벗어난 카타르시스를 추구하는 자, 이가 바로 철학자다. 플라톤이 말하는 바 '올바름'은 육체를 사상(捨象)해야 도달할 수 있고 '이데아'는 육의 눈이 아니라 말(로고스)의 눈으로 봐야 볼 수 있는 그 무엇이다. 말은 영혼의 것이다. 스스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이 인도하는 세계를 기꺼이 사랑하는 자만이 철학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항상 자기 말을 듣고 있고 스스로와 대화하는 자만이 지혜를 사랑하는 자다. 말은 이데아에 잇대어 있으므로.

따라서 자기에 대해 그냥 그럭저럭 만족하는 사람들, 별 반성 없이 하루하루를 그냥 그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철학은 맞지 않다. 또, 자기와 자기를 둘러싼 상황에 불만족하거나 공포를 느끼는 사람 역시 철학을 할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은 오히려 시가 강렬하게 끌어당긴다. 내 안에는 없지만 내 밖에 있는 웅장한 현실, 이것이 그들에게는 희망이고 위로다. 게다가 이 시를 실제로 재현할 수 있다면...! 그래서 '시인-통치자'는 대부분 '메시아'의 형태로 등장한다.

현대 민주정(民主政)은 기본적으로 플라톤이 반기를 든 아테네의 상황과 비슷하다. 물론,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전혀 다르긴 하지만서도. 적어도 '인기'(이게 뭐든 간에) 있는 자가 투표를 통해 통치자가 된다는 것은 동일하다. 따라서 현재의 선거는 기본적으로 '시인-통치자'를 뽑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후보들이 읊는 '시'를 보고 하나 골라서 표를 던지는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이 민주정에 가한 비판을 수용한다면, 그 시가 굳이 헐리웃 영화 같아야할 필요는 없다. 철학에 가까운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공약 중심으로 가면 좀 더 철학에, 이벤트 중심으로 가면 좀 더 시에 가까운 것 같은데, 미국 대선을 보면 이 양자를 골고루 섞어 놓은 것 같다.

우리는...? 걍 시만 난무한다. 헐리웃 호러 영화(북풍, 빨갱이) 아니면 서부 영화(정권 심판) 두 장르 중 하나를 골라봐야 한다. ㅠㅛㅠ 하나는 빨갱이로부터 나라를 구하는 메시아, 하나는 악당들을 무찌르고 응징하는 메시아... 어떤 시를 짓느냐에 따라 판세가 달라진다. 중간에 대본을 수정하는 드라마처럼, 한국의 정치판, 선거판은 시시각각 요동을 친다. 이러한 '다이나믹'은 한국 선거판이 오직 시로만 이루어진다는 단적인 증거인 것이다. 알다시피 선악과 올바름/그름의 가치를 초월한 순수한 시적 현실은 파시즘이다. 오직 '좋음과 아름다움(=매혹적인 것)'만 남은 세계, 이게 파시즘이 구축하는 현실이다.

그러함에도 선거에 시적 요소를 너무 무시해서는 곤란하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해리 포터 시리즈만큼의 인기를 구가한 적은 결코 없었으므로. 솔직히 아직도 이해하기 어려워서 플라톤에 대해 글 쓰고 썰 풀어서 밥 먹고 사는 사람들만 수천 명 아닌가...


2019-05-13
아마추어로서의 생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