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08, 2013

청개구리와 죽음

둘째가 청개구리 동화책을 읽어주는 걸 듣고 펑펑 운다. '엄마 빨리 죽으년(= 죽으면)?' 이러면서.

최초로 '죽음'이라는 것의 그림자나마 실존적으로 접해본 아이의 반응이리라. 참으로 우리는 죽음을 겪을 수 없다. 겪음은 항상 반성이 가능한 의식과 지속성을 전제하는데, 죽음은 이 양자 모두에게서 유리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을 종종 입에 올린다. 죽음을 겪을 수도 없으면서도.

죽음이라 이름하는 것 앞에서 산 자들이 겪는 것의 본질은 '잃어버림'이다. 죽은 자는 슬퍼하지 않는다. 죽어가는 자도, 그 죽음을 바라보는 자도 서로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슬퍼한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어떠한지는 아무도 알 수 없고 어떠한 지식으로도 알려져 있지 않다. 완전한 무지의 세계, 절대 無의 세계. 그 無의 고통을 사람은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두려움은 알지 못함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나의 죽음은 가장 두려운 것이다. 수많은 종교의 '천당'들은 이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제작되었다 ― '없지 않다.' 그래서 삶과 죽음은 그렇게 유비적으로 이어진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천당들 중 하나를 우리에게 주시려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는가. 그리스도가 열어젖히신 세계, 그의 나라는 천당 중 하나인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된다. 낮에서 낮으로, 밝음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길이 아니다. 온 세상을 어둡게 하면서 임하는 빛이 그리스도시다. 생명이라 여겼던 것을 사망으로 돌리고 임해오는 별다른 생명, 그것이 영생이다. 잃음과 없음으로 드러나는 세상의 현실을 땜방해주고 덮어주는 자가 그리스도가 아니다.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림을 받으리라.

누가 이 길을 알 것인가. 둘째의 아픈 울음 속에서 세상의 진실을 보고 그리스도의 길을 멀리 내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