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2, 2013

잣대와 떼 ― 양육, 유럽과 한국 등에 대한 뒤죽박죽 잡담

네덜란드에 오기 전에 정신분석학적 개념들을 접하고 이해를 해보려 해도 도무지 뭔가 이프로 부족함을 항상 느꼈었다. 그냥 대충 끼워 맞추는 수준에서야 그럭저럭 이해가 됐지만, 이게 딱 그렇다, 이런 생각을 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좀 오래 살다 보니, 특히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이제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바가 뭔지 조금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우리 정서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던 개념들이 여기서 아이들 키우는 모습을 보니 실마리가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네덜란드가 곧 유럽 전체는 아니지만서도 아마 유럽이라고 하면 공유하는 어떤 게 분명 있는 것 같기는 하다.

일단, 우리나라 양육에서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개념 중 하나인 ‘떼’가 여기 양육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떼’는 주로 ‘떼를 쓰다’로 쓰이며 하나의 행동 양태를 묘사하는 말인 반면, 여기서 굳이 비슷한 개념을 찾아보면, 우리말로 ‘우기다’ 정도의 뜻인 말들로밖에는 옮길 수 없는 것이다. 즉, ‘떼’는 여기서 존재성이 희박하다.

대신 여기 사람들, 특히 아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쓰는 말 중 하나가 바로 eerlijk이라는 표현인데, 이게 우리말로는 광범위하게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정직하다’부터 시작해서 ‘공평하다’, ‘공정하다’ 등등 우리말로는 다양하게 표현되는 개념들을 하나의 말로 집약해놓았다. 이 말은 항상 비교되는 두 대상이 존재한다. 정직한 것은 내외가 일치할 때 쓰는 말이다. 공평한 것은 서로 동등할 때 쓰는 말이다. 공정하다는 것은 어떤 기준에 부합할 때 쓰는 말이다. 우리말하고 가장 비슷하게 번역해보면 ‘잘 들어맞다’, 걍 줄여서 ‘맞다’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맞으려면 맞고 안 맞고를 판단할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한다. 즉, ‘eerlijk’, ‘맞다’를 중심으로 소통하는 것은 어떤 (불변하는) 잣대를 가운데 두고 사고하고 교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er는 영어로는 honor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말인데, 항상 ‘이름’과 관련된다. 명실상부(名實相符)함, 이게 바로 eer가 지칭하는 핵심 사태인 것이다.

반면, ‘떼’는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는 방식이다. 잣대의 매개 없이 사람에게 직접 호소하는 것이 떼를 쓰는 것이다. 문화마다 사안 하나하나에 대해 용납하는 하한선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는 ‘떼 쓰는 정도’까지 내려가는 사태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주 어릴 때부터 떼를 쓸 생각을 별로 하지 못한다. 이들이 ‘인간’이라는 조건에서 한국 사람들과 뭐가 다르랴마는, 적어도 여기 아이들이 자아를 갖추기 시작한 뒤 잣대를 뛰어넘어 타인을 만나는 것은 매우 희귀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규칙은 규칙이다(regel is regel)”이라는 표현은 우리나라보다 여기서 훨씬 자주 들을 수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법이요!” 할 때와 그 뉘앙스가 사뭇 다르다. 조용히 읊조리지만, 결코 변경하거나 물릴 수 없는, 물리지 않는 그런 최종적인 상황에 대한 선언인 것이다. 진짜로 regel의 반열에 오른 것들은 건드릴 수 없다. 다만, 다양한 ‘경우’들에 대한 예외 규정을 만들긴 해도 이것 역시 ‘규정’, 즉 regel인 것이다. 예외 규정, 이러면 우리문화에서는 약간 ‘봐주기’, ‘원래 규정을 약하게 하는 것’ 정도의 뉘앙스를 띄는데, 여기서는 그게 아니다.

잣대, 이건 라틴어로 ratio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적으로 풀자면 superego, 즉 ‘초자아(超自我)’다. 초자아는 외부의 잣대를 내면으로 이식(移植)하여 자기의 한 부분으로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알다시피 ratio는 ‘이성’으로도 번역이 된다. 그리고 이 이성의 가장 기본 중 기본이 바로 잣대를 가늠하는 것이고, 이 잣대는 ‘맞대면하는 것’, 즉 직관의 대상이다. 즉, 잣대를 아는 것은 무매개적 앎인 것이다. 소위 ‘예지계(叡智界)’로 번역되는 영역, 예를 들면 플라톤의 이데아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이성은 기본적으로 잣대를 관(觀)한 토대 위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잣대의 본질은 ‘불변함’이기에, 관습이나 습속보다는 진리가 잣대의 꼭대기를 차지한다. [물론, 잣대의 본질이 불변함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는 있고, 또 있어왔다. 이건 또 별도로 또 하나의 이야기라서 걍 생략.]

이상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맞대면하는 게 사람이라면, 여기(?)는 맞대면하는 게 잣대다. 요 잣대를 ‘하나님’으로 치환하면 서양신학의 큰 줄거리가 대충 끼워 맞추어진다. 물론, 잣대 중 맞대면이 원천적으로 불가한 대상(예를 들면 방금 말한 하나님)이 생기기에 형식과 내용이 삐딱선을 탄다. 이 삐딱선을 바루는 작업이 서양 전통에서는 신비주의, 스콜라신학 등으로 구체화된 것이라 난 본다. 그러니까, ‘계시’라는 개념, 좀 더 오래된 용어로는 ‘신학’이라는 것 자체가 사용되는 맥락을 찬찬히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성경에서도 그렇게 쓰이고 있는지를.

다시 본 맥락으로 돌아오자면, —..— 여기서 떼 쓰는 것을 보는 게 매우 희귀하듯,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희귀하게 보이는 광경 중 여기서 종종 보이는 광경이 있다 — 아이가 폭발하는 것. 떼를 쓰다 쓰다 안 들어주니 폭발하는 것 말고,,, 갑자기 확 폭발한다. 우리는 폭발하면 주로 사람에게 폭발을 하는데, 여기 아이들을 보면 신기한 게, 물론 부모에게 폭발하긴 하지만, 꼭 부모를 향한 폭발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규칙의 확고부동함에 대한 절망 내지는 분노, 이런 감정이 느껴진다는 거다. 부모를 매개로 하여 자기에게 임하는 규정 내지는 규칙에 대해 저항할 수 없음, 여기에 대한 무력감과 분노, 저항이 뒤섞인 복합적 반응. 그 강도나 질을 자세히 보면 우리로서는 상당히 낯설다. 아이가 저런 감정을 길어내다니…

여튼, 난 이런 양육방식이 자아의식을 상당히 강고하게 형성시키는 과정이라 본다. 더불어, 타인의 존재감 역시 규칙을 매개로 상당히 강고하게 형성이 될 것이다. 규칙을 매개로 한 거절과 거부를 통해 자아의 경계선이 그어질 것이고 이것은 곧 나와 남을 가르는, 구분하는 경계선이 되는 것이다. 부모들의 ‘자아’를 아이들 양육하는 데에도 반드시 고려를 하기에 딱딱 시간을 정해놓고 잠도 재우고 그런다. 안 자면 혼자 잘 때까지 울도록 내버려 둔다. 부모와 자식은 regel을 매개로 만나는 것이다. 규칙적인(regelmatig) 양육을 통해 아이는 규칙 안의 존재로 자라가고 아이의 자아 역시 규칙 안에서 형성이 된다.

그러나 사람이 어디 그렇게 불변하는 존재이고 고정된 존재인가. 규칙에 넘치는 사람도 있고 규칙에 모자라는 사람도 있지 않나 말이다. 규칙 때문에 빵꾸난 부분들을 아이들은 대체물로 채운다.

요즘 우리나라에 다시 전통육아방식에 대해 긍정적인 분위기가 감지되는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책을 구입해서 읽어봤는데, 전통육아의 핵심은 ‘무매개적 양육’이었다. 부모와 아이 사이에 끼어드는 매개를 최대한 제거하고 부모 대 아이 그 자체로 맞대면하는 것, 이게 전통육아의 정신이더구만. 여기 육아방식이 엄마와 아이가 살 대 살로 만나는 게 적다면, 전통육아방식은 포대기로 업는 것이 상징하듯 엄마와 아이가 매개 없이 소통한다. 엄마로서의 본능, 즉 아기가 뭘 원하는지 감지하는 본능, 울면 안아주고 달래주고 싶은 본능 등에 충실하면 할수록 전통육아에 충실하게 된다. 언어의 개입조차 자제하고 본능, 즉 ‘감’으로 아이와 소통하는 것, 이게 요체인 것이다. 감이라는 것은 이심전심의 차원이고 이심전심은, 서양식으로 말하면 심퍼씨 내지는 컴패션의 극단적 형태라 할 수 있다. 서로가 동일하게 갖추고 있는 ‘육신’이라는 조건을 근거로 소통을 하는 것이니 말이다. 육신이라는 것은 ‘말’을 하지는 않지만 모든 ‘뜻’은 육신에서 나온다.

우리나라가 서양의 근대를 받아들여 근대화되었다지만, 난 겉모습만 비슷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요즘 들어 많이 하고 있다. 양육방식부터 철저히 바꾸어 서양식으로 해야 서양식 근대화가 완성되는 게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게다가 우리나라가 문화적으로도 뒤죽박죽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별로 안 좋다. 양육, 특별히 어린 아이의 양육에 있어서는 ‘감’이 중요하지만, 감과 육신은 제어될 필요가 있다. 이심전심이 극단적으로 악하게 발현된 게 왕따 아니겠는가. 애착육아는 좋은데 성인이 된, 심지어는 결혼한 자식들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지 못하는 부모의 자식 사랑은 과연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가.

뭐, 이야기가 괘발새발이 되었지만, 여튼 우리나라는 두 가지 흐름을 창조적으로 병합할 수도 있고 아니면 완전 이상하게 뒤죽박죽이 될 수도 있는 조건을 함께 갖추고 있는 듯하다. 서양에 대한 연구도 부지런히 하고 또, 우리 전통에 대한 연구도 해야할 듯 싶다. ‘잣대’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은 어땠는지, 잣대를 어떻게 대했는지, 이런 것들을 연구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유학 연구, 그리고 민요나 전래 동화 분석, 조선경국전, 경국대전 같은 책들 연구 등을 통해 양육과 교육의 총체적 방향성에 대한 논의를 해야하는 시점에 있지 않나 싶다.


2019-05-06
요즘 와서는, 사람 사는 데 다 비슷하다,,, 라는 생각이 더 든다. 떼쓰는 아이도 있고. 물론, 그렇다고 위 내용을 철회할 정도는 아닌 듯 하다. 게다가, 정신분석학을 위와 같이 이해한 것은 피상적인 (몰)이해라 할 만하다. 머, 정신분석학에 대해 깊이 공부할 의욕은 별로 없으니, 앞으로 아는척하는 것은 자제하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