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네덜란드개혁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어떤 부분은 대체적으로 만족하고 어떤 부분은 굉장히 부러운 부분들도 많았지만, 몇 가지 불만사항도 있긴 있다. 그중 하나가 여왕생신 즈음 주일 예배 끄트머리에 네덜란드 국가를 부르는 것이다. 내가 고신 출신이라 그런지 몰라도 이건 매우 거북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초기에는 아예 입도 안 벌리고 있다가 분위기 썰렁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요즘은 그냥 입은 벙긋벙긋한다.
적어도 고신교인이라면(요즘에는 별로 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국가를 신앙과 연결시켜볼 때 결코 긍정적인 인상이 먼저 들지는 않는다. 조선예수교장로회에서 축출된 게 국가의식(을 빙자한 종교의식)을 거부한 게 그 계기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적어도 고신교인이라면 소위 ‘용공반대’의 에토스를 다른 보수교단과 공유한다 하더라도 공산주의 역시 ‘국가’의 형태로 압제했었음을 결코 잊지 않는다.
신구교를 통틀어 한국기독교는 기본적으로 국가에 핍박을 받거나 푸대접을 받았다. 이건 교회사를 조금 공부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교회사에 일관되게 흐르는 보편적 양상이다. 요즘에야 학계에 소위 ‘순교신화’에 대한 반박이 주류를 형성하는 듯하지만, 굳이 매번 순교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교회가 국가와 그리 친하지는 않았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구약 선지자들, 신약 성경의 고갱이를 고려한다면 기본적으로 기독교회는 결코 친국가적일 수 없다.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의 문제인 것이다.
여기에 예외가 있다면 바로 콘스탄티누스 이후 기독교가 지배적 종교가 된 것과, 로마 제국 몰락 내지는 쇠퇴 후 교회가 ‘행정집단’으로서의 기능을 감당한 것을 계기로 소위 세속통치자와 더불어 나란히 영적 통치자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일 것이다. 역사는 가정할 수 없다고 하지만, 사실(史實)에 대한 입장은 다양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적어도 신구약의 방향성에 이질적인 것이라 본다. 따라서 신학 작업은 불가피하게 복잡해지고 떨떠름한 결론들이 난무하게 되었다. 로마제국에서 태동한 동서방 교회 양자에 이건 공히 해당된다. 물론, 세밀하게 들어가면 동방과 서방이 국가에 대한 관계나 태도가 많이 다르지만, 적어도 ‘우리’ 입장에서는 양자 공히 국가와 교회가 얽혀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건 성경 자체가 제공하는 일관성과는 거리가 있다.
종교개혁도 이러한 상황 하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다니는 네덜란드개혁교회는 자유교회 전통임에도 예배 시간 중에 국가를 부르는 게 결코 껄끄러운 일이 아니다. 빌럼판오란녀가 지은 이 국가는 찬송가책(liedboek)에도 포함되어 있다. ‘로마가톨릭’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투쟁을 시작한 빌럼판오란녀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네덜란드 사람들에게는 국부 비스므레하다. 교회에서 기름 부어진 세속통치자는 ‘참 신앙 파수’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건 바꾸어 말하면, ‘(이단 및) 우상숭배 근절’이기도 하다. 알다시피 종교개혁기에 나온 웬만한 신앙고백서들은 죄다 정부에 대한 역할을 이런 식으로 규정하고 있다. 로마가톨릭도 예외는 아니다. 계몽주의 시대 들어와서야 비로소 판도가 달라진다.
게다가 종교개혁기와 소위 신앙고백주의기[Konfessionalisierung]의 시작은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신앙고백주의의 시작은 민족주의(nationalism)의 태동과 거의 일치한다. 신앙고백주의 및 민족주의는 교황권과, 교황의 기름 부음에 명분을 두고 있는 속권이라는 보편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므로. 네덜란드 독립 전쟁 역시 로마가톨릭, 즉 교황권과 스페인이라는, 로마가톨릭이 지원하는 속권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수행되었던 것이다. 이게 정치적이기도 하지만 또 신앙적이기도 하다는 것이고 기본적으로 이러한 국가는 신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국가에 대한 충성이 별로 분리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보면, 왕을 원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규정이 된다. 심지어 하나님이 친히 택하셨다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서조차 하나님 말고 다른 통치자를 원하는 건 반역으로 치부되었고, 그들의 반역에 대한 심판으로서 왕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다윗의 왕좌’는 스스로를 부인하는 한에서, 즉 스스로가 ‘왕이 아님’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한에서 왕으로 머물 수 있는, 기이한 왕좌였던 것이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구약의 다윗 왕좌에 대한 묘사는 모두 문학적 레토릭으로 화한다. 왕 앞에다 왜 ‘평화의’라는 수식이 붙는지, 왜 왕이 백마가 아니라 나귀를 타고 오는지, 이런 것을 모두 문학적 수사로밖에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은 분명 하나님이 세우셨다. 하지만, 그 왕좌는 사울도, 다윗도 앉았던 왕좌고, 따라서 심판인 동시에 약속이 되는 왕좌였던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셨음’에 방점을 찍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제도’라는 사실 자체가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개념은 많은 것을 설명하긴 하지만, 주권이라는 말 자체가 서양의 봉건제에서 기인한, 기본적으로 봉건제적 개념이라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서양에서 하나님이 왕이라고 할 때 기반하고 있는 개념틀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성경을 근거로. 왕정 등은 분명,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은 맞지만, 그 시작은 하나님 말고 다른 왕을 원한다는 것, 인간의 반역이라는 것을 중하게 고려해야한다고 난 본다. 그냥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 그래서 정당한 것, 이 정도로 머문다면, 정부 내지는 통치자 내지는 권력 등에 대한 충성심, 갈망 등이 그저 좋은 것, 거룩한 것으로만 간주될 위험이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 말고 다른 통치자를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것이다. 인간의 이 악함을 딛고 모든 왕, 권력 등이 서있는 것이다(설령 그 정부가 도덕적으로 탁월하고 혹은 기독교 정부라고 해도 말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시고 허락하셨다.
교황이 기름 부은 숱한 왕들이 앉았던 왕좌들은 죄다 사울의 계보를 잇는다. 이건 도덕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의 문제다. 교황좌 역시, 스스로를 권(權)으로 치부한다면, 사울 계통일 수밖에 없다. 개신교 통치자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우리는 기독교인이기에 다윗의 왕좌는 오직 예수님께서만 착좌하신다는 것을 고백한다. 예수님 당대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과 대립했던 지점이 바로 여기가 아닌가! 제아무리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이 육체로 사실 때의 사역과 꼭같은 사역을 이루는 왕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계통은 사울일 뿐이다. 이건 예수님도 확인해 주신 바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마 20:25)
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말하여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삼상 8:10, 11, 17)
숱한 소위 하나님 나라들이 있지만 우리는 그 나라들의 계통이 무엇인지, 어디 계보를 잇고 있는지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비단 왕이 아니라 민(民)이 다스린다 하더라도 이러한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봐서는 민주정(民主政)이 분명 우월하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결국 세상 다스림은 사망 권세 아래 있는 것이고(시 49:15, 89:48, 호 13:14, 마 16:18), 그 본질은 ‘죽지 아니하려 함’이기(창 3:3, 마 4:3, 6) 때문이다. 우선은 생존이 다스림의 과업이 되고 그 다음은 잘사는 것, 복지가 과업이 된다. 우선은 정의(正義)가 과제가 되고 그 다음은 공영(共榮)이 과제가 된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야말로 국가의 맨얼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국가가 ‘기독교 집권자’로 코스프레를 하면 기독교인들이 편하게(?) 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사울 역시 ‘이스라엘’의 왕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종교개혁은 수많은 유익이 있었지만 국가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여전히 서양 상황의 한계 안에 있다. 종교개혁 좌파인 재세례파는 이 부분을 통찰하긴 했지만, 국가 권력 자체를 거부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나는 국가가 인간 ‘만큼’ 타락한 존재라 본다. 국가는 신성하지도, 그렇다고 인간보다 더 타락하지도 않은, 딱 같은 정도로 ‘인간적’이다. 하나님이 관원들에게 칼을 주실 때 그들의 ‘종교’를 고려하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칼을 가진 관원이 얼마나 ‘선을 베풀기 위해’ 쓰는지에 따라 통치의 수준은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적인 권력까지 행사하면 더 나을 것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차이를 내는 게 아니라, 인격이 된 인간이라는 사실이 차이를 낸다. ‘그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고, 신앙 덕분에 훌륭한 인격이 형성된 인간이다’라는 조건이 만족된다는 전제 하에서 처음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다른 측면이지만, 재세례파 해석의 중요한 분기점은 바로 신구약 중 신약에 방점을 찍는다는 거다. 소위 ‘신약적’이라는 수식어는 제세례파를 이해하는 데 키포인트라 난 본다.】
우리는 국가 권력을 악마화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공직을 담당하고 국가에 충성을 약속하는 것은 죄악이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개인 차원에서부터 집단 차원에 이르기까지 ‘다스림’을 배제하고서는 굴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다(롬 13:1). [심지어 아나키즘조차 다스림 자체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에 허락하시고 정하신 다스림들과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 안에서 다스리시는 그 다스림을 구분하고자 할 뿐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악함 중 가장 뿌리 깊은 악함이 바로 자기들이 기뻐하는 다스림(예를 들면, 재물(맘몬) 등)을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기름 붓고자 하는 욕망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삼상 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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