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0, 2014

주권(主權)에 대한 이런 저런 잡설: 카위퍼의 Antirevolutionaire staatkunde를 뒤적이다 문득

요즘 공부와 관련해서도, 또 현실과 관련해서도 '주권(主權)'에 대해 많이 생각을 한다. 이 개념이 나름 오래되었기에 켜켜이 퇴적물들이 있다. 게다가 우리가 사회 시간에 배운 '국민주권'이라는 프레임으로는 충분하게 탁 들어오지가 않았다.

결국 주권은 '더 위의 권세/권위/권력이 없는 권세/권위/권력'이라는, 다소 복잡하지만 기본적 뜻을 곱씹으며 접근을 하는 게 더 낫더라. 서양의 흐름에서 주권을 이해할 때 가장 기본적인 것 중 하나가 '진짜 힘'(?)이라는 것도 얼마전에 알게 되었다. 국민주권, 이렇게 말하면 우리 입장에서는 '권리', 이런 뉘앙스가 강했는데, 역사를 죽 살펴보니 결국 주권의 가장 기본은 진짜 힘(폭력이 기본이 되는)이었다. 하나님이 주권자다, 이렇게 말할 때, 단지 하나님의 권리, 이게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심'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얼마전에서야 겨우 깨달았다.

그래서 주권을 (적어도 정치적 의미에서) 이야기할 때 우선 중요한 것은 '칼의 향방'이라 하겠다. 누가 칼을 쥐고 있느냐. 봉건사회에서는 이게 명확했다. 이른바 귀족 계급. 게다가 귀족계급과 평민들의 무력 차이는 압도적이었기에 누구도 '국민주권'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직접 짠 나타나셔서 귀족들에게 주권을 위임하신 것은 물론 아니지만, 하나님 힘의 일부인 칼을 가진 자들은 독점적으로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고, 실제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말고 귀족만큼 '진짜 힘'이 있는 그룹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 실제 벌어진 일보다 더 상징성을 띠게 된 것도 칼자루가 비귀족계급, 즉 이때까지는 주권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평민들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평민들에게 주권이 넘어간 상황은 주권이 하나님에게서 위임되었다고 정당화하기도 쉽지 않고(평민들은 존재의 위계 상 가장 밑에 있으므로), 정당화가 굳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아니, 정당화가 가능하지 않았다. '민의'라는 것은 '수많은 뜻들'의 존재이므로. 이것은 결코 하나님 주권의 모형이나마 될 수도 없는 것이다. 굳이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지 않아도 주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런 프랑스 혁명의 근저를 거부하는 카위퍼, 특히 그의 '영역 주권론'을 읽으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여러 모양의 '역능'이라고 해얄까,,, 여튼, 재능, 권력, 지력,,, 등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 그래서 역능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여튼 그런 역능들로 표현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는 원래 '하나'였던 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표현하는 '오르간'(기본적으로는 개인)을 타고 다양하게 발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래저래 모아보면 몇 개의 영역으로 묶인다, 이게 내가 이해한 바 카위퍼 영역 주권론인데, 여기서도 '진짜 힘'(역능은 진짜 힘이다)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러한 역능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난 뒤 각 역능들을 '제모습대로' 보존하는 썰을 푸는 게 영역 주권론의 뒷 부분이다. 예를 들면 국가라는 영역의 주권은 적어도 국가라는 영역에서는 이보다 더 높은 것이 없어야 국가의 영역 주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예를 들면 교회 영역의 주권이 국가 영역 주권 위에 올라타버리면 국가 영역 주권이 사라지거나 왜곡되고, 이것은 심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왜곡시키는 것이 된다, 등등.

지금까지 이야기를 좀 정리해보면, '힘이 있어야 보편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보편과 특수가 선험적인 실체로 존재하기보다는, 힘(역능)이 있는 게 보편이 된다는 뜻이다. 나는 근대 역시 '유럽의(유럽적) 힘'을 바탕으로 성립된 보편이라고 보는 편이다. 개인적으로 카위퍼 이야기가 스피노자 썰하고도 비슷하고, 더 나아가서는 푸코의 권력이론하고도 맥이 닿아있는 듯 보이는데, 카위퍼는 매우 보수적인 결론과 처방을 내린다. 요 접점과 저 결별 지점을 찬찬히 살펴보는 게 상당히 재밌고, 어쩌면 나름 의미있는 일이 되지 않을 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