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아들을 낳는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알듯이 아버지는 그 아들로써 알려진다.
아담은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창 5:3)을 낳았지만 그에게 무궁한 생명을 줄 능력은 없었다. 그러하기에 아담의 모든 계보는 ‘죽었더라’로 끝이 난다. 아담을 아비로 둔 땅위의 모든 아비들은 아담과 똑같이 자기 아들에게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인 자기 몸밖에 물려줄 수밖에 없다. 이 몸, 바로 이 몸이 아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생명 아니던가! 그러나 오호 통재라! 이 몸은 사망의 곤고한 몸 이상일 수 없다.
그러하기에 모든 아비는 큰 몸을 도모하여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한다. 아버지로서의 육정, 그것은 사망을 건너갈 수없는 육신의 절대 한계에서 근원한다. 건나갈 수 없기에 더욱 애틋하고 그러하기에 큰 몸집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몸이 물질이든, 정신이든, 그 무엇이든. 아비로서의 짠함과 애틋함은 내가 몸을 준 그 자식의 몸에서 사망이 역사한다는 그 엄연한 사실에서 비롯한다. 북한의 김씨 왕조에서든, 남한의 대형교회에서든 아비가 아들에게 ‘큰 몸’을 물려준 것은 윤리적으로 비난받는다. 하지만 이것의 근원은 그들의 비윤리적 심성이 아니라 이미 내 몸조차 넘어서 버린 사망 권세의 충만한 위력이다.
하나님에게도 아들이 있다. 기왕 하나님도 ‘아버지’라 불리기에, 아담 안에서 정의된 ‘아버지-아들’의 맥락을 피해갈 수 없다. 하나님 아버지 역시 아들을 통해 알려지신다. 그러하다면 우리는 아담 안에서 정의된 맥락을 무제한적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독생자에게 적용할 수 있는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전제되어있는 신적 속성에서 연역되는 게 아니라 계시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그 무엇이다.
아담 안에 있는 아비는 결코 자식을 “죽음의 고난”(히 2:9)을 받게 할 수 없다. 법적으로는 ‘직계비속살인’ 범주에 해당될 것이고 윤리적으로도 극악한 행위이다. ‘자식을 죽음에 내모는 아버지’, 이것은 아담의 세계에서는 형용모순이다. 그러나 아버지라 불린, 그리스도 예수의 그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순종하여 이 죽음의 고난을 받은 아들만이 참 아들로 인정된다. 참 아들의 나타남은 항상 아들의 죽음에서 시작되고 온전해진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히 5:8) 된다.
왜 참 아들은 죽음의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가? 그의 몸에서 사망을 이기는 권세가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이김은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 2:14).” 사망으로 말미암아야 사망을 이김이 나타난다. 죽음의 고난을 받지 않는 아들, 죽지 않으려는 아들에게는 부활 역시 없다. 하나님은 오직 부활생명을 주시는 아버지로 드러나려 하신다. 그렇지 않다면, 사망을 넘어설 수 없는 생명을 주는 자로 나타난다면 그 역시 아담에 속한 일개 아비일 뿐이다. 아담의 육신을 멸하여 심판하시고 아담 안에서 나오지 않은 능력으로 그 육신을 살리실 때(= 영)라야 참으로 그가 “영의 아버지”(히 12:9)임이 밝히 계시된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히 2:15)하는 모든 육체는 부활생명과 그 능력을 알지 아니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조차 육체대로 섬기려 한다. 죽지 않으려 함, 즉 사망 권세 아래 있는 생명을 그에게서 구하게 된다. 그를 아담에 속한 아비, 아담의 육체에서 나온 신들 중 하나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사 40:6-8) 선다. 마르고 시들 육체의 영광은 육체가 사망 아래 있기 때문에 구하게 되는 무엇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은 육체를 안 죽게 하는 신이 아니라 죽음의 고난을 받게 하시고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