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주에 굉장히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했다. 한국의 국가수반이라는 대통령이 지극히 사적인 종교적 인간관계에 휘둘리어 국정을 농단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이 사건은 비단 이 사건 자체만로만 볼 것이 아니다. 그간 한국 사회에 누적되어온 부조리들이 농축되고 응집되어서 터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극히 보수적인 신앙인의 입장에서 봐도 지금의 상황은 위기 상황이다. ‘전도’가 왜곡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전도(傳道)가 어떤 말들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믿음’, ‘의-죄’, ‘사랑’, ‘긍휼’, ‘선-악’, ‘능력’, ‘권위’, ‘용서’, ‘심판’ 등등. 이러한 말들은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서 전도자에게나 전도를 받는 자에게나 ‘그 일차적 의미가’ 반드시 보존이 되어야 하는 말들이다. 생활 세계에서 믿음이 취사선택의 맥락에 놓이고, 불의(不義)가 의(義) 대접을 받고, 사랑과 긍휼을 경험하는 일이 매우 희귀하고, 선과 악은 항상 ‘맥락적으로’ 정해지고, 능력은 항상 기득권을 의미하고, 용서는 봐주기와 뇌물과 구분이 되지 않고, 심판을 말해야 할 때 용서와 사랑을 말하고. 생활 세계의 로고스가 이렇게 왜곡된다면 제대로 복음은 전해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조차도 인간의 거대한 탐심 속으로 빨려 들어가 흡수되어 인간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전서 2장을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한다. 즉, 모든 사람, 특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는 것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는 것에 결정적이라는 뜻이다.
왜 그러한가? 바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즉 권세를 가진 사람들은 ‘로고스’를 왜곡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리사욕을 가지고 선을 악으로, 의를 불의로 바꾼다면 로고스가 왜곡된다. 그렇게 되면 구원을 받는 진리 역시 왜곡이 된다. 진리는 로고스, 즉 말에 담기어 전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바로 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바로 앞장인 디모데전서 1장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도하는 것이 핵심 주제인데,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로고스(말)! 이 로고스가 왜곡되면 우리는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 전도의 문이 막히고 왜곡된 복음이 판치게 되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교회에 먼저 심판이 임한’ 상황이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전도를 잘 하기 위해서도 ‘한국말을 사용하는’ 우리는 지금의 상황을 엄중하게 대해야 한다. 기도가 필요하고, 또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로고스를 왜곡하는 일에 저항해야 할 것이다. 거창하게 사회 참여 운운할 것도 없다. 적어도 보수적인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특별히 자기 모국어로 이루어진 생활 세계의 수준은 신앙과 전도에 결정적인 요인인 것이다. 신앙 역시 이른바 ‘공공성(公共性)’을 담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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