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은 육을 부인함과 함께 하는 생명 주심이다. 육을 심판하고 육에서 나지 않는 생명(피)을 약속하고 주심이 언약이다. 따라서 언약을 받는 자는 자기의 죽음을 보고 동시에 육에서 나지 않는, 사람의 손을 타지 않는(=사람으로 말미암지 않은) 피뿌림(생명)을 본다. 모든 언약에는 이 사실이 예외 없이 잠언과 비유로 새겨져 있다. 언약에 약속되어 있는 복들은 심판과 피를 대입시켜 보지 않고서는 반드시 육적인 것들(재물)로 화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 금송아지로 만드는 일로 끝나기 마련이다.
언약이 항상 육 안에 있는(=땅에 있는, 세상에 거하는) 자들을 향해 발해지는 것이기에 언약은 반드시 약속을 포함하게 된다. 여기(=세상, 육)에 속한 어떤 것이 언약이 지향하는 생명일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있는 어떤 것이라면 이미 받은 것이고 이미 소유한 것인데 새삼 언약을 맺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언약에서 약속을 보지 못하거나 약속을 봤다 하더라도 단지 장차 올, 땅에서 나는 어떤 것으로 환원한다면 언약에 속하지 않은 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된다. 따라서 역으로, 언약을 제대로 아는 자만이 피조물을 선하게 쓸 수 있고 피조물을 ‘이미 받은 것’으로 여겨 감사히 받아 누릴 수 있게 된다. 믿음이란 언약에 속한 약속이 지향하는 그분, 그 현실을 보는 눈을 얻는 것을 말한다. 의인에게 환란이 오는 이유를 언약 안에서 설명할 수 있는 자가 진정한 의인이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따라서 언약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유언’처럼 육에서 죽는 것이 필요한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모든 육체는 원래 죽을 운명인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기운이 진해서 죽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자기 허물과 죄로 죽을 운명인 것이다. 그러니까 어차피 한 번 죽는 건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육신들이 죽은 뒤 자동적으로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가? 그렇지 않다. 자기 허물과 죄로 죽었으니 죽은 뒤 심판이 있을 뿐이다. 언약은 생명의 세계인데 어떤 육체라도 죽은 뒤(=생명을 빼앗긴/지불한 뒤) 언약 안에서 살아남을 만큼 부요하지/온전하지 않다. 여기에 육에 대한 심판(=할례≒계명들≒의문에 쓴 증서)을 걸머질 한 육신, 의로운 몸의 등장이 필요하다. 안 그러면 언약은 헛되고 헛되다.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유언(언약)은 유언한(언약 맺는)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언약)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언약 맺은)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히 9:15~17).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