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6, 2017

‘혈육주의’를 넘어서

(사 40: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사 40: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성경에 따르면 우리가 영원하다, 지속된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실체는 안개와 같이(약 4:14) 그 실재(實在)가 없다. 심지어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물성(物性)과 감각(感覺), 그리고 감정(感情)으로 다가오는 우리 몸조차 풀과 꽃처럼 마르고 시들어(사 40:6~8) 사라짐을 성경은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라고 권면하고 있다. 영원히 서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이라는 것이(사 40:8) 성경의 일관된 입장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수많은 소위 ‘~이즘’, ‘~주의’들이 있다. 이념이라 이르든, 이데올로기라 이르든 수많은 사람들이 (반쯤은) 영원한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인생과 뜻을 바치는 것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돌아보면, 당대에는 곧 집어삼킬 것 같던 이데올로기, 사상, 그리고 체제였음에도 지금은 그저 책으로만 남아있거나 매우 쇠락해서 흔적만 남아있는 이즘 혹은 주의들 역시 많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세상을 정복할 것 같았던 현실 공산주의는 이제 미미한 세력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고, 서구 열강의 힘에 밀려 갈수록 쪼그라들 것만 같았던 이슬람은 근본주의를 발판으로 하여 최근까지도 크게 세력을 얻어가고 있다. 곧 망할 것 같던 북한은 핵무기를 만들어 세계를 위협하고 경악하게 하고 있다. 수많은 목숨들이 이 영원할 것 같은 이즘과 주의의 톱니바퀴 속에서 환호하고 또 스러져 갔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수많은 이념과 이데올로기가 생겨나는가?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소멸하는 이념과 이데올로기가 대다수인데도 왜 사람들은 다시 소망을 가지고 이념과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가? 모든 육체가 풀이기 때문이다. 모든 육체는 항상 결핍에 시달린다. 현실은 항상 모자란다. 먹을 것이 모자라고 입을 것이 모자라며 아름다움이 모자란다. 따라서 모든 육체는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들에 끌리고 또 그런 것들을 생산해내려 한다. 이에 요한 사도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갈파했다(요일 2:16). 이데올로기와 테크놀로지는 그 근원에서는 구분되지 않는바, 모두 풀인 ‘육체’, 그 아름다움이 들의 꽃과 같은 ‘육체’인 것이다. 현실의 결핍들을 종합하여 생산해낸 플라톤의 이데아들은 이후에 도래할 물질문명 테크놀로지의 저 깊은 뿌리 중 하나였던 것이다.

수많은 이념들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테크놀로지가 명멸(明滅)하지만, 이 모든 것은 ‘혈과 육’으로 수렴된다. 땅위에는 결코 순수한 ‘관념론(觀念論)’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의 관념조차 혈과 육에 의해 통제되며 혈과 육에 의해 조성된다. 플라톤은 현실을 육의 영역, 이데아들을 지(知)와 영(靈)의 영역에다 각각 할당했지만, 성경은 이 전부를 ‘혈과 육’, 즉 ‘육신(肉身)’으로 간주한다. 플라톤이 구성한바 이데아의 세계 역시 성경은 육신에 속한 것으로 보고 있다.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모든 육체가 풀과 같고 그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지만, 또한 죽음과 태어남 사이에서 명멸하며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어제의 이데올로기와 테크놀로지는 내일의 이데올로기와 테크놀로지와 다르다. 현실은 끊임없이 변하고 결코 멈추어있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의 육체는 어제의 육체와, 그리고 내일의 육체조차와도 결코 다르지 않다. 어제도 결핍이 있었고 오늘도 모자람이 있고 내일도 부족함이 있을 것이다. 여전히 먹어야 살고 아름다움은 추구하며 결핍은 메우며 날들을 이어간다.

엊그제 독일 연방하원 선거에서 다시 극우 돌풍이 일어났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전 세계에 극우의 바람이 다시 맹렬하게 불어 닥치고 있다. 사람들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입에 담지 못하던 말들과 가슴에 품지 못하던 생각들을 이제 담대하게 내어놓고 있다. 결핍은 모든 것을 정당화시키며, 이 결핍이 어느 정도 채워질 때까지는 ‘이데아적인 올바름’조차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지닌다. 양차대전 후 비약적으로 발전한 물질문명의 시대, 생산의 시대가 이제 황혼에 접어들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는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한가운데서 지속되는 큰 결핍들을 마주하며 살아야할지도 모른다. 책에서 보던 이즘과 주의와 철학과 이념들이 부활하는 것을 목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혈과 육은 옛 사람들의 혈과 육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즘과 주의와 철학과 이념과 테크놀로지를 일러 우리는 ‘혈육주의’로 통칭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선, 우리에게 다가와 있는 결핍들을 직면하고 모자람들을 직시해야할 것이다. 결핍과 모자람의 시대일수록 우리는 이 결핍과 모자람을 바울이 말한바 헛된 것들로 채우려하기 십상(十常)이다. 특히 우리 신앙을 이러한 결핍과 모자람들을 채우려 하는 데에 이용하지는 말아야할 것이다. 스스로의 육신을 자랑하고 자부심을 갖는 것 역시 헛된 것이다. 교만, 더 나아가서 인종주의 및 민족주의는 가장 기초적인 혈육주의다. 혈육주의가 횡행하는 한가운데서 우리는 실상(實像)을 말씀에 터하여 꿰뚫어보도록 하자. 그리고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노력하되 기대할 수 있는 만큼만 기대하자. 바울 사도가 권면하는 대로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자.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7:31).

우리는 우리 육체에, 세상의 현실에 궁극적인 소망을 두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망이 전혀 없는 자들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다스림을 누리며 산다. 떡처럼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오히려 모든 것을 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 모든 것을 명령하여 생기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둔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신다(고후 4:6).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그 말씀이 이제 우리를 살리는 빛으로 우리를 비추심을 즐거워하며 우리는 오늘 또 하루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