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5, 2017

하나님과 나르시시즘

하나님은 나르시시스트인가? 그렇지 않다. 나르시시스트는 사람이면서 스스로를 하나님과 같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붙여지는 이름이다. ‘믿을 건 나밖에 없다’, 이것이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의 자세다. 의식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이 하나님은 항상 초자아가 아니라 자아가 된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적인 측면에서 나르시시즘은 가장 고도화된 불신앙이라 할 수 있다. 유일함과 궁극적인 독특성의 추구는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허락된 일이다.

하나님의 옳으심(의)은 자명한 이데아적 진리가 아니다. 드러나고 나타나야 한다. 영원토록 옳으시다는 판단은 나타난 것들을 보고 판단한 것이다. 성부에 대한 궁극의 데이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부는 성자를 통해 인식되고 완결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언명은 모든 나르시시스트적 시도를 분쇄한다. 하나님은 어떤 소위 하나님스러움을 통해 온전히 인식되지 않는다. 오히려 죄인으로, 저주받은 자로 정죄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인식된다. 도식적으로 말하면, 성부 하나님과 스스로를 동일한 지위에 놓는 자가 나르시시스트이다. 그러나 사람 안에 있는 나르시시스트적 욕망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르시시스트와 정확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행보를 취하셨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인간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어느 정도 같아진 부분이 있을 때 행복하다. 이것을 단지 억압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닮기’가 인간 에너지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인간이 스스로 완벽하게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시대, 어떤 장소에서든 다르고 또 다양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 닮기는 존재하였고, 존재하고, 존재할 것이다.

인간은 자기 혐오가 기본이고 자기 사랑이 이후에 오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우리가 성경을 보면 후자임을 알 수 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 2:25). 자기 혐오라는 것은 자신의 벌거벗었음에 직면하여 나올 수 있는 반응 중 하나다. 그런데 분명, 아담과 하와는 이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스스로를 혐오하지 않았다. 왜 그러한가? 그들에게는 이 벌거벗었음을 덮어줄 사랑과 긍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긍휼 밖으로 나왔을 때 이제 자기 혐오가 시작된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 3:7).

그리스도인은 자기 혐오를 바탕으로 자기애를 갈망하는 나르시시스트일 수 없다. 오히려, 시작은 긍휼이다. 거듭남은 항상 긍휼과 사랑에서 시작하고 이 긍휼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벗었음조차 부끄러워하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