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2, 2018

서양 인식론의 맹점

Searle이 최근 ‘미투 운동’의 폭로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그의 철학 전반을 반성하게 한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실재론을 꽤 높이 평가하는 입장인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의 존재론과 인식론 일반에는 욕망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것은 서양 철학 전반의 맹점이기도 한 듯 하다.

물론, 욕망의 문제는 과학의 대상도, 철학의 보편적인 주제도 아니라는 항변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항변은 분명 타당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함에도 찜찜한 것은, 욕망이 과연 인식, 더 나아가서는 존재 역시 규정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똑같은 빵을 바라봐도 욕망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인식되지 않는가. 물론, 이러한 다름들은 엄밀한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 역시 올바른 것은 아니다.

존재론 및 인식론과 윤리학이 결합되어 있지 않은 것은 장점도 있겠지만 단점 역시 지대하다. 동양의 불교 및 유교 등의 전통사상은 존재론-인식론-윤리가 결합되어 있다. 근대에서 이는 큰 단점으로 작용했지만, 미투 운동 등을 통해 다시금 욕망에서의 권력과 윤리를 생각하게 된 현재로서는 장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1)

Searle은 자신이 가르치는 여성을 성폭행 및 성추행했다고 한다. 한 건이 아니라 꽤 자주 그랬다 한다. 그의 인식론에 따르면 그 여성은 그저 이러저러한 여성, 단 하나의 형상으로 인식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인식하지 않은 면모, 아니, 그가 자신의 인식에 포함시키려 하지 않은 면모가 결국 그의 실천을 좌우했다. 자신이 가르치는 여성들을 성적인 욕망의 대상으로 삼은 것, 이 추악한 욕망은 그의 존재론에는 현상하지 않고 인식론의 대상도 아니다.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가 인식하지 않으려 하고 과학에서 배제시키는 이러한 삶의 면면들이다.

과학이 적어도 내적으로는 욕망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과학은 반드시 방편을 통해서 수행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는 경험적, 그리고 경험의 차원에서 검증이 되는 이론적 방편들이 없으면 과학 자체가 불가능하고, 이 과정에는 욕망의 문제가 끼어들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소위 ‘비과학적’ 인식은 사람 자체가 방편이 된다. 즉, 방편의 역할을 사람의 몸과 마음이 대신한다, 그러므로 객관화된 지식(= 검증/실험 가능한 지식)이 불가능하다―바로 여기가 근본적인 지점이다. 욕망은 ‘자기 내부’에 있기에 인식의 대상으로 간주되지 않게 된다. 욕망을 인식하고 말하는 것은 실재론이 될 수 없고 항상 관념론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욕망을 대상화하고 인식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과학과는 거리가 멀지만 꼭 필요하다.2)

Searle이 옹호하는 실재론은 철학적 인식론에서 부재할 수밖에 없는 방편들의 존재를 뇌과학, 신경과학 등의 결과들을 원용하기에 결과적으로 이 과학 분과들의 방편들을 이용하는 격이 된다. 사실, Searle뿐 아니라 대다수 분석철학자 및 심리학자들이 따르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욕망과 주관이 제거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철학(인문학)이 ‘비과학적임’을 포기하는 게 더 나은 길일까…? 글쎄, 난 아직 잘 모르겠다.


  1. 그렇다고 해서 소위 ‘PC’가 해결책은 아니다. 세속적 모세율법처럼 돼버린 PC 내부의 욕망은 윤리적이고, 이것에 포섭되지 않는 욕망은 비윤리, 반윤리라고 단순하게 여기는 것은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입장이다. ↖︎
  2. 서양적 해결 중 하나는 ‘사실’과 ‘가치’를 분리하는 것인데(예를 들면, 스티븐 제이굴드), 이것 역시 지극히 서양적이다. 가치 역시 어떤 면에서든 객관성을 담지한다고 전제되기 때문이다. 이때의 객관성은 사실의 확정이 아니라 일종의 (사이비) 보편성에 터하고 있는 위태위태한 것이다, 자연과학적 시각으로는. 그래서 (자연)과학으로 대우를 받고 있는 지금의 심리학은 (과장 좀 보태서) 거의 통계학의 한 분과처럼 되어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