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지혜는 ‘있는’ 집착을 놓고, ‘있는’ 상(相/想)을 여의는 것이다. 불교 입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도 중생일 뿐이다. 더 나아가, 불교가 보기에 복음은 여호와라는 중생의 업장(業障)에 끄달리는 것 이상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의 집착에 머물고(=하나님이 집착하는 것을 나도 집착하고), ‘없는 것으로 보이는’ 상(하나님의 형상, 약속들)을 붙잡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믿음’이다(히 11).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행(菩薩行)조차 복음의 입장에서는 지옥이다. 보살이라는 것은 일체중생을 구제하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誓願)한 중생이다. 그러나 일체중생은 한량 없다. 따라서 보살행 역시 끝이 나지 않는다. 물론, 보살에서 부처가 되면 윤회가 끝이 나겠으나, 내가 부처가 된 이후에도 중생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차마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내가 부처가 되는 시점이 나 빼고 모든 중생이 성불한 뒤라고 어떻게 보장하겠는가.1) 그러니 부처가 되기 전까지는 끝없이 윤회하며 일체중생의 한량 없음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행에 들어선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한없이 윤회하겠다는 각오를 하고 들어서는 것이다.2) 영겁을 윤회하는 것, 여기는 ‘안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원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이런 사람들의 마음의 원대로의 세상을 허락하신다. 그들은 영원히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갈망으로 불타며, 그래서 한없는 시간을,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 그들이 자기 원함(誓願)으로 이른 곳, 그리고 한없이 머물고자 하는 곳은 복음의 입장에서는 ‘불지옥’ 말고 다른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것이다. 만물을 구원하겠다는, 가장 ‘하나님 같은’ 이 서원이 그들을 지옥으로 이끄는 것이다.
- 물론, 여기에 대한 해결책이 불교 내부에서 이미 등장했다. 불교는 보통 큰 물음에 답하는 방식으로 종파 내지는 교단이 형성되는데, 정토삼부경을 소의(所依) 경전으로 삼아 성립된 ‘정토종’이 답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물음이다. 즉, 보살 중 ‘내가 부처가 된다면 내 이름을 열 번만 부르면 극락에 왕생하게 될 것이다!’라고 서원한 보살이 있다. 이 보살이 바로 법장, 부처가 된 뒤의 이름은, 우리가 잘 아는 ‘아미타불’이다(이 글 참조).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극락은 그저 일종의 ‘파라다이스’가 아니라, ‘수행하여 성불하기 최적화된 환경을 제공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냥 속세를 윤회한다면 엄청나게 오래 수행해야 성불할 수 있다. 그러나 극락에서는 이 시간이 비약적으로 짧아진다. 아미타불의 서원을 근거로 행하는 것이 바로 염불(나무아미타불)이다. 더 나아가서, 심지어 지옥에 있는 중생들까지 구제하겠다고 나서는 보살(지장보살)도 있다. 그러나 내가 이 글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기본적인 구도이다. ↖︎
- 한국 같은 대승불교권에서 불교를 신앙하는 것은 곧 보살행 서원을 하는 것이다. 이 서원을 하는 사람은 그 즉시 ‘보[리]살[타]’, 즉, ‘부처가 될 중생’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