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3, 2010

일본 정토진종의 창시자 신란(新鸞)의 ≪탄이초≫를 읽고 있다

오래된 글

불교는 일반적으로 자력(自力) 종교로 알려져 있다. 스스로 수행하여 해탈을 구한다. 그러나 이른바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는 타력(他力) 구원의 실마리가 되는 내용들이 등장한다. 여기에 중심적으로 등장하는 부처가 바로 아미타불이다. 아미타불은 원래 법장(法藏)이라는 비구승이었는데, 48개의 큰 서원을 세우고 오랜 수행 끝에 서원을 모두 이룬 뒤 부처가 되어 극락세계를 다스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아미타불의 서원{‘본원(本願)’이라고 부름}에 의지하여 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게 정토진종을 비롯한 소위 ‘정토종’이라 불리는 종파의 기본 아이디어인 것이다.

신란은 1173에 태어나서 1236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루터보다도 무려 300년 가까이 전의 인물이고, 이때는 일본에 천주교를 비롯한 기독교적 영향이 전무했던 시기다. 그런데 탄이초를 읽어보면, 놀랍게도 ‘절대타력’, ‘오직 믿음’이 등장한다. ‘절대타력’은 종교개혁에서 말하는 ‘오직 은혜’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신란은 스스로 구원을 이루겠다는 수행방법을 모두 버리고 오직 아미타불의 서원에만 의지하라고 한다. 이것에 대한 방편이 바로 염불인데, 이건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의 뜻이 바로 ‘아미타 부처님께 귀의합니다’이다. 아미타불은 서원을 했다. 그리고 중생은 이 서원을 믿고 복속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담은 게 바로 염불이다. 나무아미타불, 즉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것이다. 염불은 비행비선(非行非善), 즉 뭘 하는 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염불한다고 해서 공로가 생기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아미타불에 귀의하는 일념을 표현해내는 것이고,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미타불의 자비로 극락왕생한 것에 대한 보은(=감사)의 표시일 뿐이라는 것이다. 읽어보면, 용어만 좀 바꾸면 루터나 칼빈이 말한 것과 흡사한 내용들이 엄청 많이 나온다. ≪탄이초≫에서 제일 유명한 구절 중 하나인 다음 인용을 보라.

“선한 사람일지라도 극락정토에 태어날 수 있으니 하물며 악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보통, “악한 사람일지라도 서방정토에 태어난다는데 하물며 선한 사람은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말한다. 일단 그럴듯하지만 그것은 아미타불의 본원과 어긋나는 말이다. 그 까닭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탈을 향해 수행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는 자만심 때문에, 또 아미타불의 서원에 의지하는 마음이 없기에 아미타불의 서원과는 어긋나는 것이다.

이거 종교개혁이 당대 천주교의 공로사상을 비판한 논리 형식과 매우 유사하다. ‘전적부패-오직 은혜-오직 믿음’의 연쇄 논리와 매우 비슷하지 않은가. 물론 불교와 기독교라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긴 하지만, 형태적 유사성이 매우 크다. 이제까지 배우기는, 기독교는 절대 타력의 구원을 말하고 다른 종교는 자력 구원이다, 이건데, 신란을 읽어보면 이런 주장은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1)

시니피앙의 유사성을 가지고 시니피에까지 재단하려 했던 근대의 성경학은 물론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흐름에 대해 시니피앙의 독특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맞서는 건 별로 승산이 없다. 진작부터 난 성경의 시니피앙에 있어서의 독특성을 밝히는 걸 거의 포기했다. 그리스 철학의 이분법은 성경의 이분법과 형태적 유사성이 있다. 그래서 서양 신학은 플라톤을 빼고는 사실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유학, 무속 등에도 읽어보면, 그리스 철학 못지않은 형태적 유사성이 종종 발견된다. 중동과 서양이 아니라 우리나라나 중국에서 기독교가 발생하여 발전했다면 분명 유학, 무속, 불교 등의 형태적 유사성들에 습합되었을 것이다. 역으로, 이러한 형태적 유사성이 전도 내지는 복음화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긴 하다(고전 9:20~21). 여튼, 중요한 건 시니피앙이 아니라 시니피에다. 복음을 담고 있는 그릇들이 아니라 복음 그 자체다. 역사적으로 복음조차도 유대교의 반립으로 시작하지 않았는가! 유대교를 반박하고 떨어져 나온 무리가 기독교회이지 않은가!

복음의 ‘시니피에적(?) 새로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2) 예수 그리스도의 임하심을 단지, ‘오직 은혜-오직 믿음’이라는 시니피앙의 구성물로 여겨서는 복음의 새로움이 확실히 드러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임하심은 시니피앙적 사건 이전에 시니피에적 사건인 것이다.


  1. 물론, 위의 내용은 당연히 ‘기독교적(개신교적)’ 관점에서 비교하여 서술한 것이다. 정토 역시 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며, 따라서 업(業, karma)과 완전히 결별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수행이 필요하다. 즉, 정토종 역시 당연하게도 온전히 불교의 틀 안에서 이해되는 것이며, 따라서 기본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즉, 개신교적 분류로 보자면 ‘공로주의’에 속한다. 엄밀하게 따져 들어간다면, 정토는 천주교의 ‘연옥’과 의미적 연결 고리가 있을지 몰라도 종교개혁의 ‘오직 은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이 글도 참조). ↖︎
  2. 이 글과 이 글을 참고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