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7, 2021

불평등, 자본주의

어떤 하나의 능력 등은 선천적이다. 즉, 본래적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연 상태는 어떤 하나를 기준으로 보면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체로 사람들에게 빈번하게 선택되는 능력들, 가치들이 있다. 권력, 재력, 매력 등이 그것이다. 동서고금 많은 사회가 비슷한 양상으로 계급화 · 계층화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예를 들면, 줄넘기 잘하는 능력, 절대 음감, 시력 같은 것을 기준으로 계급이나 계층이 나뉘는 사회는 없다시피 하다. 모든 가치가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사회는 인간이 선악을 분별하는 한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들은 항상 취사 선택되며, 그러해야 가치가 가치로 머물 수 있다. ‘천한’ 것은 어디나 있기 때문에 천해진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자연적’ 불평등을 후천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자본의 축적으로 이게 가능해졌는데, ‘원칙적으로는’ 자본을 축적하는 길이 모든 종류의 인간 능력에 열려있기 때문이다. 즉, 제약이 없다. 한 능력이 기울면 자기가 가진 다른 능력을 이용해서 자본을 축적할 수 있다. 자연적 불평등이 화폐라는, 교환 가치를 독점적으로 담지하는 상품을 통해 극복 가능한 것이 된 것이다. 기존 사회에서는 별 쓸모도 없던 능력과 조건이 (새로운 시장을 조성하거나 기존 시장에 어필할 수만 있다면) 화폐로 교환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이 이러한 ‘평등’ 지향적 자본주의의 면모를 효율적으로 극대화한 사회다. 그것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바로 ‘아메리칸 드림’이다. 출신 배경, 선천적 우열에 관계 없이 근면하게 돈을 모아 자본을 축적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사회, 그것이 바로 미국의 이상이다.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실제로 미국은 이러한 이상이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작동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시대를 선도하는 새로운 시장들 중 다수가 미국산이다. 지금도 미국이 만들어낸 시장이 세계를 장악하고 있다(비근한 예로 구글, 아마존, 마소, 애플, 전쟁 산업 등).

그러나 자본주의 역시도 그 시작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축적된 자본은 이제 일종의 ‘자연’이 된다. 마치 토지와 같은 것이 되어 지대(rent)를 산출한다. 또, 자본을 모은 사람은 이른바 ‘제도적 자연성, 선천성’을 형성하려는 경향이 생긴다. 즉, 자본력은 권력으로, 신분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고, 심지어는 그 소유자의 ‘본성’이라고까지 여겨진다. 이러한 상황은 축적된 자본을 자연스러운 것,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만들어주는 제도 및 법을 산출하게 된다. 금수저가 확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적 자연성은 분명 문제이긴 한데, 이것을 해결하는 것이 쉽지 않다. 제도적 자연성의 부분부분을 문제 삼는 것은 가능하나, 자본주의로 인해 발생한 제도적 자연성 자체를 ‘불의하다’고 심판할 근거가 자본주의 안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심판하는 순간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자본주의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거나 이데올로기나 윤리 혹은 인간의 선천적 동정 등의, 자본주의 ‘외부’라고 그나마 여길 수 있는 것들을 동원하자는 것인데, 이 둘 모두 녹녹한 게 아니다. 자본주의보다 더 권위적이고 불의하며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로 귀결하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자본주의로 말미암아 생기는 제도적 선천성을 그냥 놔두면 그것은 또 하나의(유사) 자연적 불평등을 수용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자본주의 본래 긍정적 면목과 상충된다.

윤리적 판단을 넘어 국가 주권의 작동 방식(‘체제’)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에 섣불리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없으나1), 자본주의로 인한 제도적 선천성을 ‘본래 그런 것’이라 강변하는 것 역시 자본주의가 터하고 있는 ‘윤리적’ 토대마저 허물기 때문에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제도적 자연성/불평등을2) 문제시한 것이 분명하고, 이것이 자본주의가 터하고 있는 윤리적 기반이다. 이런 윤리적 기반마저 허물어버린다면, 즉, 제도적 자연성/불평등을 자본주의의 이름으로 전면적으로 긍정한다면 결국 파워 게임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전선은 자본주의 논쟁을 넘어 ‘윤리적’인 것이 되어버리는데, 즉, ‘제도적 자연성/불평등을 선하다고 여기는 편’과 ‘악하다고 여기는 편’ 간의 패싸움이 된다. 이게 극단화되면 파시즘과 혁명의 시간이 도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윤리 패싸움이 됐는데도 자본주의 논쟁 이름 하에 진행이 된다. 기존 전통적 자본주의 논쟁에 일종의 무임승차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대안 우파’니, ‘신좌파-피씨’니 하는 그룹들은 이미 이 단계로 들어선 것 같다.

이래저래 쉬운 일이 아니다.


  1. 자본주의 사회가 공산주의 사회나 봉건제 사회, 더 나아가서, 반문명적 생태주의 사회보다는 훨씬 나은 사회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 글도 보라. ↖︎
  2. 예를 들면, 봉건적 귀족제라는 제도적 자연성을 타파한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부르조아 계급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