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친구, 직장, 가족, 교회 등)에서 종종 화가 나는 상황에 부딪힌다면 그건 그만큼 제 안에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많기 때문이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 성도님, 평안하시지요?
함께 말씀을 나눈 후, 여러 생각을 하고 또 가다듬어 보았습니다. 말씀하신 내용 중, 위 질문에 핵심이 담겨 있는 듯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생활인이기에 신앙에 입각해서 이러한 고민에 대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쉽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어떤 문제에 대해 매뉴얼처럼 처방을 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 역시 함께 길을 가는 신앙인으로서 제 신앙의 경로와 제가 경험한 바 한계 안에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제가 성경공부 시간에 말씀드린 것은 제 신앙적 판단으로는 원론적으로는 맞는 말이긴 합니다. 모든 분노는 분노하는 사람이 그냥 씩 웃어버리면 일어나지 않을 일들입니다. 말씀하신 여러 사건들도 ○○ 성도님이 그냥 쓴웃음으로, 혹은 혀 몇 번 끌끌 차고 넘겼어도 될 일들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타고난 성향, 그리고 후천적 경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 역시 분명합니다. 그러하기에 개인마다 일정 수준의 ‘판단’ 마지노선이 있습니다. 살인이나 절도 같은 일은 지구상 웬만한 사람이면 모두 나쁜 짓이라고 여기고 분노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분명하게 선악이 갈리는 일은 인생 살아가면서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회색지대이다가 이 선을 넘으면 용납하기 어려운 나쁜 일, 악한 일이 되는 어떤 선이 분명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선은 한 개인의 인격의 경계이기도 합니다.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된 첫 사람 아담의 자손들은 모두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선악을 따라 판단할 수 있는 일이 많은 사람이면 많은 사람일수록 인격의 범위는 넓어집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면 사람일수록 자기 고양감은 상승합니다. 자기 안에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인격은 확장됩니다.
분노(진노)는 하나님의 특권입니다. 선함과 옳음(의로움)을 가진 존재라야 분노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가장 두드러진 표징은 사람이 진노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1) 옳은 것(옳다 여기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이 분노하고 더 많이 화를 내게 됩니다. 첫 사람 아담 안에서 하나님과 같이 된 모든 사람은 분노하고 멸시함으로써 자기 인격의 지평을 넓히려 하고 고양감을 맛보려합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인격과 존재는 메울 수 없는 구멍이 나있기에 자기가 기왕에 잡은 옳은 것들도 놓지 않으려 하고, 더 나아가서 더욱 많은 옳은 것을 계속, 더욱 획득하려 합니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분노하고 더욱 멸시하는 존재가 되어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실천적으로 변하는 부분은 내 안의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물보다 더 많은 물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옳은 것들을 조금씩 놓아갈 수 있고, 하나님이 나를 옳다 하신 것 말고는 사실 내 존재를 흔들 만한, 혹은 내 존재를 고양시킬 만한 옳음이 없게 됩니다. 내 안에서 옳음을 유지하거나 더 획득하려 돌리던 에너지를 다른 데 쓸 수 있게 됩니다.
크고 작은 화를 안 내고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생에는 화를 반드시 내야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내는 분노 자체를 악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화를 줄여가는 것은 가능합니다. 투사나 회피 없이, 그러나 정죄도 없이 자기 안의 어둠과 분노를 직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아,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이 정도의 깝냥이구나, 이것을 백프로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됩니다. 정죄 없이 직면해야 내 안의 어둠을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기 어둠과 약함을 자기 것으로 직면하지 않고 밀어내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는 정죄는 성경이 말하는 죄 고백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전자에는 외식이 열매 맺고, 후자에는 죄 사함이 열매 맺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이 약하다는 말을 먼저 합니다. 열등감이나 자기 비하도 사실은 자기 어둠을 제대로 직면하지 않아서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의 약함을 알고 받아들인 연후에야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먼저 자기를 긍휼히 여기고 약하고 보잘것 없어보이는 자기를 수용해야 그 다음 스텝이 가능합니다. 자기를 긍휼히 여길 때, 화를 내고 불평하는 자기를 직면하고 긍휼히 여길 때 분노와 어둠은 줄어듭니다. 물론, 이것은 단번에 되는 게 아니라 일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분노하는 자신을 정죄 이전에 수용하고, 그런 자신을 긍휼히 여기고 바라볼 수 있다면, 똑같은 일에 계속 분노하고 좌절하는 자신을 긍휼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 반복은 자꾸 줄어들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인생 경험이니 자신있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만 나를 긍휼히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아버지의 눈으로 나를 긍휼히 보십니다. 【더 나아가서, 이전에는 화를 내는 것으로, 자기 의를 세우는 것으로 풀어낸 분노의 에너지를 좀 더 생산적인 방식으로 풀어낼 여유도 생깁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의와 하나님 거역을 용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긍휼은, 약하지만 회개하는 사람에게 향하는 것이지, ‘끝없이 자기를 세우고 용납되기 요구하는 의인’에게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죄인으로 직면하며 시인하고 자기 죄를 고백할 수 없는 긍휼은 참된 긍휼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렇게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이 사망의 몸’의 인도를 따라 걸어가는 사람이 아님을 또 명심해야 합니다. 내 안에 죄가 거하며, 내가 사망의 몸 가운데 있는 것을 직면하고 시인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죄와 사망의 이 몸을 전폭적으로 긍정하고 그것을 따라서는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셨고, 또 지금도 건지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로 이어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우리는 여전히 우리 몸에 거하는 죄와 사망과 싸워야 하며, 육신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일단, 이 정도까지만 말씀을 드리고 다음에 뵈면 또 말씀을 나누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