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어떤 불의도 자기 십자가로 생각하고 견디고 스스로 삭여야 하는가?
고난 주간을 지나면서 신앙의 핵심인 ‘인내’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의 고난 역시 그 핵심이 ‘십자가를 참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함’(히 12:2)이었으니 인내는 가히 신앙의 본질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살다 보니, 고난과 인내를 다른 사람을 억압하거나 가스라이팅 하는 데 쓰는 사람들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기가 부당하게 대하며 감사하라는 둥, 인내하라는 둥, 모든 것이 은혜라는 둥, 사랑은 모든 것을 덮는다는 둥 이야기하면서 당하는 사람에게 행하는 불의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에게서 몸과 마음을 받은 사람(=모든 사람)은 불의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당하면 ‘분노’하게 되어있다.1) 이게 ‘하나님과 같이 된’ 모든 사람의 모습이다. 예외 없이 그러하다. 자기를 선하다고 여기는 인간의 이러한 고집과 완악함이 세상 정의(正義)의 기본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힘과 교묘한 가스라이팅으로 억압하는 것은 당하는 사람의 분노가 쌓이게 한다. 분노라는 것은 에너지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근간이 되는 힘들 중 하나다. 그런데 분노가 정당하게 발산되지 않으면 사람 안으로 내파(內破) 되거나 아니면 터지지 않고 덩어리가 되어 쌓이게 된다. 전자는 보통 우울증이나 공황 장애 같은 것을 유발하고, 후자는 한(恨)을 만든다.
‘기독교적’ 사랑의 기본은 인간의 죄와 악(=악함)을 말하기 전에 인간의 ‘약함’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 스스로 선하다고 여기는 완악함, 이것은 이길 수 없는 사망에 대한 두려움(=약함)과 결탁되어 나온다. ‘세상에서 가장 능력 있고 교만한 사람’이 또한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다. 분노는 자신을 선하다고 여기는 존재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가장 큰 악은 자기가 그럴 만한 이유 없이 ‘당하는’ 것이며, 바꾸어 말하면 ‘이유 없이는 당하지 않음’은 기본적으로 유지되어야 하는 ‘선(善)’이다. 이유 없이 당할 때 가장 큰 분노가 나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유 없이 당하는 것을 없애거나 최소화하는 것이 그 근본이 약함인 인간을 배려하는 기본이다.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흐르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알게 되었지만 (홀로 선하신 하나님과는 달리) ‘약하기 때문에’ 분노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이유 없이 당한 고난이 아니다. 십자가는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내가 당하고 참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내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순종하셔서 고난 당하신 것이며, 많은 사람에게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기 위해서 고난 당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래 참음과 인내는 모두 이를 위해 발휘된 것이다. 단순히 참는 것, 인내의 ‘미덕(美德)’을 실현하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신 ‘이유’가 있었고, 십자가를 참으시고 바라셨던 ‘기쁨’(대가)이 있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사도들은 부당하게 고난을 당할 때, 즉 항거할 상황이 되지 않고 강압적으로 고난을 당할 때 참으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이걸 오해하면 안 된다. 그때조차 ‘그냥’ 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라고 한다.
(벧전 2: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벧전 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그렇다면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의 핵심이 무엇일까? 바울 사도가 이야기해준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 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바로 하나님의 ‘분노(진노)하심’이다.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에조차 참을 ‘이유’가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그 일에 진노하셔서 보응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분노할 분노를 하나님이 대신해주시고, 이 분노에는 반드시 보응이 따른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믿는다.
그렇다면 나를 억압하고 가스라이팅 하는 자가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스스로 구원받았다는 확신도 있는데? 교회도 열심히 다니는데? 물론, 여기에 대해 우리는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이다, 예수를 믿고 하늘 아버지를 안다고 하는데 억압과 가스라이팅을 달고 사는 사람이라면 자기 말과 자기 됨됨이가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반드시 그에 따르는 실천, 즉 행위(열매)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2) 이것은 굳이 신앙이 아니라도 다른 영역도 그러하다. 예를 들면, 배우자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불륜을 멈추지 않는 사람,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를 무시하고 억압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사랑한다는 말은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가능성’ 정도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살전 2:4)은 진리대로 판단하시고 보응하실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구원의 확신’이 있어봐야 구원을 결정하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한편으로는, 위의 베드로 사도가 말하고 있듯이, 내가 당하는 모든 고난을 부당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이것 역시 신앙을 가지고 범할 수 있는 또 다른 과오다. 신앙은 가해자를 정당화하는 데에도,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데에도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
(레 19: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그러나 이것은 사실은 시작이다. 영성적인 면에서 보자면 기독교 신앙의 최고봉은 바로 긍휼과 자비이다. 자기 독생자를 영접하지 않고 결국 살해할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는가(롬 8:32).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충만히 부어지는 것이다. 뱀처럼 지혜로워져서, 나를 가스라이팅하고 억압하는 사람에게 잘 대처할 수 있지만, 또 비둘기처럼 순결해져서, 그렇게 ‘아등바등 악하게 사는 그의 약함’을 긍휼히 여길 수 있다면3) 나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고 있는 것이다. 이게 당장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잘 되지 않아도, 심지어는 원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인생의 풍파와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셔서 우리를 사랑의 자리, 은혜의 자리, 자비의 자리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가운데 날이면 날마다 자라고 있다(고전 2:16).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깜냥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면서, 물주고 정성스레 가꾸시며 자라게 하시는 자비로운 농부이시다. ‘복수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다름 아닌 이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본래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에게 내주신 하나님이심 또한 믿고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는 바로 이 하나님을 믿고 닮아가고 있다.
- 이 글을 보라. ↖︎
- 바울이 행위로는 구원 못 받는다고 했는데, 이 행위는 ‘사람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행위 무용론 내지는 행위는 악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한 의로운 행위”(롬 5:18)는 우리 구원의 근거이며, 믿음은 우리 행위 일체에 대한 소망은 끊고 그리스도의 행위를 의지하는 것이다. 여기에 뿌리를 내리고 닻을 내리는 것이다. 이럴 때 이제 우리 행위가 그리스도의 행위와 ‘같은 계열’(=그리스도를 본받음, 롬 15:5 등)에 속하게 된다. 야고보 사도는 이 지점을 지적하면서 행위 무용론을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1).” 바울 사도도 이렇게 말한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롬 2:3).” ‘입으로는’ 죄악을 비난하면서, 자기가 비난하는 일을 ‘행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 바울 사도와 야고보 사도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 것이다. ↖︎
- 물론, 이런 이야기를 꺼내고 또 권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