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8, 2021

날 달로 날려줘(Fly me to the moon):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보고(1)

【약간의 ‘결정적인’ 스포 포함. 독자가 정주행했다고 전제하고 쓴 글. 개연성을 발견하려는 내 나름의 시도(내 나름의 플라톤적 읽기). 허세 주의. ^^;; 신앙적 관점에서 쓴 후속글은 여기.】

넷플릭스에서 지금 전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봤다. 내 나잇대 사람들의 추억을 돋게 하는 장면들이 처음부터 곳곳에 등장하더라. 오징어 게임은, 내가 살던 부산에서는 ‘오징어 달구지’라고 불렀는데, 공격 측에서 ‘오징어!’라고 외치면 수비 측에서는 ‘달구지!’라고 외치면서 게임이 시작되었다. 이 놀이는 무릎이 까지는 건 예사고, 손톱이 빠지기도 하고 머리가 깨지기도 하며, 팔다리, 손가락 삐는 것은 부상 축에도 들지 못할 정도로 격렬하게 진행이 되었는데, 전통 놀이 중 인기로 탑을 달렸다.

주인공 기훈이 오징어 게임을 하는 장면으로 드라마는 시작된다. <오징어 게임>의 묘미는, 오징어 게임이 ‘비현실적’이라는 데 있는 게 아니다. 1화에서 상우가 말하듯이, 오징어 게임장에서는 납치, 감금, 살인 등의 형사 범죄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그러나 납치, 감금, 살인을 기반으로 성립된 오징어 게임장은 단순히 하나의 ‘이세계(異世界)’가 아니다. 경찰인 황준호의 잠입이 보여주듯이, 공권력이 미칠 수 있는 곳이다. 오징어 게임장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 겪고 있는 세계의 농도를 진하게 한 세계, 말하자면 지금 현실의 ‘곱버스’이자 ‘레버리지’인 세계인 것이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 기획자는(아마도 오일남일 것인데) 이 ‘과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펼쳐놓았을까? ‘과하게 순수한’ 것으로 내놓았다. 드라마를 보면 금방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색감이다. 오징어 게임장의 색깔뿐 아니라, 진행 요원들의 의상, 그리고 게임 참가자들의 의상 모두 알록달록 화려하다. 이 알록달록함과 화려함은 재미의 순수한 색이다. 오직 놀이의 재미만 존재하는, 아니, 지배하는 현실이 바로 오징어 게임장이다. 드라마에서 오일남의 입에서 나온 ‘재미’는 아이들을 열심히 놀이에 참여하게 한 근본적인 동인이었다. ‘재미’를, 혹은 재미만을 현실을 규정하는 진리치(眞理値)의 기준으로 둔다면 알록달록한 오징어 게임장은 가장 순수하게 ‘참’인 현실이다. 

그렇다면 놀이(게임)에서 ‘재미’는 무엇일까? 자기 일생(一生)을 걸고 뛰어들어 이기는 것이다. 즉, 놀이에서 느끼는 재미의 본질은 ‘짜릿함’이다. 놀이를 하다가 ‘졌을 때’ 아이들이 사용하는 탈락, 아웃, 죽었다 같은 용어들이 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면, ‘빠질 脫’에 ‘떨어질 落’으로 구성된 ‘탈락’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의 의미로 보자면 꽤 살벌하다.

그런데 놀이를 하다 탈락한 아이들은 그저 집에 갈뿐이었다. 차라리 어른이 되어 마주하고 참여하는 ‘놀이 아닌’ 현실이 더욱 놀이 재미의 본질에 가깝다. 탈락하고, 아웃되고, 죽는 상태에 문자적으로 더 가까운 것은 오히려 어른들의 현실이다. 그래서 어른들의 욕망은 아이들의 그것보다 더 거대하며, 더 깊으며, 더 짜릿하다. 기훈은 어른이 되어 현실을 오히려 거대한 (오징어) 게임으로 겪게 된다. 기훈이 망해서(= 탈락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찾은 곳은 다름 아닌 경마장, 즉 ‘말들이 달리기 놀이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렇게 ‘재밌는’ 놀이조차 ‘돈을 버는(혹은 잃는)’ 수단이 되어버린 게 바로 지금 어른이 되어 마주한 현실이다. 기훈은 이미 탈락자가 되었고, 신체포기각서까지 써야했다. 그래서 2회의 제목은 ‘지옥’이다.

놀이가 끝나고 아이들이 집에 가면 엄마가 해준 따뜻한 밥이 기다리고 있다. ‘테레비’ 좀 보다가 ‘식고 자면’ 하루가 끝이 난다. 마지막에 상우가 죽기 직전에 기훈에게 말한 것도 바로 이것이다. 즉, 아이들의 놀이 혹은 게임은 더 거대한 현실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더 거대한 현실의 논리에 포섭되어 있다. 즉, ‘순수한’ 재미로 되어있는 현실이 아닌 것이다. 탈락했다, 죽었다, 아웃이다 등에 ‘명실상부(名實相符)’하는 현실이 아니다. 이 드라마가 다른 데쓰게임물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바로 ‘인간이 보인다’라고들 말하던데, 이 말인즉슨, 거대한 현실을 그대로 게임과 동일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기고 탈락하고 아웃되는 게임에 포섭되지 않는 어떤 잔여물들이 존재한다. 사람마다 제각각 형편이 다르고, 절절한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설령 이것이 현실이라는 게임에서 탈락하거나 아웃되어서 생긴 사연들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게임을 구성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마치 놀이가 끝나고 집에 가서 ‘밥 먹고 식고 테레비 보다가 자는’ 현실이 놀이와 격리되어 있고 단절되어 있듯이. 게임 자체를 아무리 쪼고 닦달해도 이 ‘잔여물’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마장에서 돈을 딴 기훈이 딸의 생일을 축하하며 부녀의 정을 나누는 자리는 경마장이라는 사행(射倖)의 자장(磁場)이 미치지 않는 곳이다. 이 잔여물을 굳이 이름붙이자면 ‘인간성’일 것이다.

오징어 게임 기획자는 탁월하게, 그러나 교활하게, 이 잔여물을 ‘불순물’로 여겨 내다버리지 않고, 오히려 ‘순수한 게임 현실’을 세우는 머릿돌로 쓴다. 인간성이라는 이 잔여물을 기반으로 ‘순수한 재미’의 세계가 세워졌다. 여기서의 인간성이란 선악의 잣대에 구애받지 않는다. 기훈은 어머니의 병이, 덕수는 조직의 돈을 횡령하다 발각된 상황이 결국 그들을 다시금 오징어 게임에 참여하게 한 직접적인 이유이긴 하지만, 이 둘 다 똑같이 오롯이 ‘인간성’이다. 사랑이든, 증오든, 탐욕이든, 도피든 모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들이며, 또한, 게임 외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인간적인 사연들은 돈, 즉 ‘빚’이라는 형상을 띠고 나타나는 데서는 서로 다르지 않았다. 잔여물들이 빚이라는 형상으로 ‘순수’해졌기 때문에 오징어 게임장 밖에 있었음에도 그것의 머릿돌로 선택될 수 있었다. 이는 놀이에서 빚이라는 것이 ‘벌칙’과 ‘술래 되기’라는 좀 덜 순수한 모습으로 이미 불가결(不可缺)하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재미만이 현실을 규정하는 진리치의 기준이 된 ‘순수 재미의 세계’가 실현된 것이다. 탈락하면 일생(一生)이 끝나는, 명실상부하게 ‘게임’인 현실, 아무런 유보 없이 일생을 걸고 게임이 진행되는 현실이 바로 오징어 게임장이다. 여기에는 ‘엄마가 부르면’ 탈락 없이 퇴장할 수 있는, 게임과 격리되어 나란히 서있는 현실이 없다. 가면과 벽 뒤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이들의 격리는 오히려 이 순수한 재미의 현실을 위해 복무한다. 진행 요원들은 자기 목숨을 걸고 진행을 하고, VIP들은 자기 재산을 투척하며 내기를 걸고 관람한다. 이 게임장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은 순수하게 재미를 따라 움직이는, 이른바 ‘(순수한) 재미의 아바타’들이다. 이제 모든 것이 순수해졌고, 그래서 모든 것이 참되다. 오징어 게임장의 격리의 벽은 ‘미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에셔의 작품들을 연상시키는 게임장은 ‘공간(空間)’이 무한(無限)하기에, 무한의 프랙탈이기에 오히려 벽이 된 형상이다. 텅 비어 있지만, 어떤 것에도 막혀있지 않지만 견고한 벽이 참가자와 참가자, 참가자와 진행 요원, 진행 요원과 VIP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이는 오징어 게임장의 순수함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한 기획자의 안배이리라. 

그렇다면 오징어 게임장은 모든 잔여물이 제거된 순수의 자리이기만 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우선, 오징어 게임장은 참가자들의 상금을 걸 수 있는 VIP들이 있어야 세워질 수 있다. 이들의 돈은 게임장 밖에서 가져오는 것이다. VIP들은 ‘거기서 여기로, 돈을 들고 그저’ 들어온다. 그러므로 이들은 게임을 관람하기는 하지만, 이들이 즐기는 재미는 사실, 오징어 게임장 밖 현실의 논리에 한 다리 걸쳐 있는 재미다. VIP 중 하나가 웨이터로 위장한 황준호를 따로 불러 오징어 게임과 관련 없는 쾌락을 돈을 주고 충족시키려 한 것은 그 때문이다(여기서 그의 가면이 벗겨지고 ‘맨 얼굴’이 드러난다). 그들에게 오징어 게임은 자기 돈을 지불하고 산, 자기 쾌락을 충족시키는 여러 수단들 중 하나일 뿐이다. 진행 요원들은 게임에 목숨을 걸고 참가하지는 못하지만, 큰 사고 없이 자기 목숨만 부지하면 그럭저럭 큰돈을 만질 수 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이들 역시 게임보다는 게임 밖 현실에 더 접속되어 있다. 이들 중 일부가 몰래 장기 밀매를 했다는 사실은 이들 전체의 지향이 무엇인지 단적으로 드러낸다. 게임장 밖에서 기훈을 쫓아다니던 사채업자들이 노리던 것 역시 사람의 장기였다. 그렇다면 게임 참가자들은 오직 재미만을 위해 움직이는가? 이것도 그렇지 않다. 오징어 게임장에서 그들의 재미는 ‘공포’라는, ‘짜릿함의 순수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무서워만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서로 사지(死地)로 몰아넣기도 하고 서로 정을 나누기도 하는 인간성을 게임 내내 버리지 않는다. 재미는 인간들이 있어야 생겨나지만, 인간들이 있는 곳에 재미 외의 것들, 잔여물들, ‘인간성’이 들어오는 것을 근원적으로 막을 방법은 없다. 가면 뒤로 모든 인간성을 숨기려 했지만, 가면이 필요 없다고 여겨진 얼굴들이 여러 표정을 갖는 것조차 봉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오징어 게임에서 오징어 게임장의 ‘이데아’를1) ‘찐’으로 이해하고 긍정하는 인물이 딱 두 명 나온다. 바로 (게임의 기획자라 확실시되는) 오일남과 프론트맨 황인호이다.

오일남은, 이름 그대로, 모든 놀이(게임)에서 ‘일등한’ 사람, 즉 이긴 사람이다. 그는 재미진 느낌, 즉 짜릿함을 쫓아서 평생을 살아왔고, 현실에서 더 이상 짜릿함을 느낄 수 없을 때 오징어 게임장을 구축했다. 그는 말하자면, 오징어 게임 중간 다리를 건너서 두 발로 뛸 수 있는 ‘암행어사’가 된 사람이다. 그리고 동그라미와 세모가 겹치는 부채꼴(천당)을 밟고 ‘만세!’를 외친 아이였다. 【드라마의 첫 장면은 결국 기훈이 아니라 바로 오일남의 인생을 요약한 것이 된다.】 만세 하고 난 뒤에는 고이 집에 가서 엄마가 차려주시는 밥 먹고 식고 자면 되는데, 그는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즉, 그는 짜릿함을 위해 인간성을 버렸다. 예전에 아내도 있고 아들도 있었던 것으로 나오는데, 지금 그의 옆에는 아무도 없다. ‘돌아갈 집’이 없는 것이다.

황인호는 원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이는 그의 동생 황준호의 말을 통해 확인된다, 동생과 홀어머니를 두고 떠날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그러나 황인호 역시 오일남처럼 인간성을 버린 사람이다. 오일남은 짜릿함을 쫓다 보니 인간성을 버렸기 때문에 인간성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남아있다. 구슬 게임에서 이 사실이 잘 드러난다. 짜릿함에 대한 갈망이 인간성에 대한 그리움을 삼켜버린 사람이 오일남이다. 그러나 황인호는 모종의 계기를 통해 인간성 자체를 버린 것처럼 보인다. 오징어 게임 우승자인 황인호 역시 나와서 기훈처럼 상금을 쓰지 않았다. 오징어 게임 바깥에서 상금을 쓴다는 것은 바깥을 긍정할 때 가능하다. 기훈은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분명 어머니를 위해 상금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황인호는 아예 홀어머니와 동생을 만나지 않고 오징어 게임 안으로 돌아가 버렸다. 돌아갈 집이 없지 않고 있는데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오징어 게임 밖 세상을 긍정할 수 없었다. 긍정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짜릿함이라는 재미나, 돈이나,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오징어 게임이라는 현실 그 자체를 자기 ‘일생(一生)’으로 삼은 사람인 것이다. ‘찐 오브 찐’이라 할 수 있다.

오일남을 움직인 것은 짜릿함이었다. 그렇다면 황인호를 움직인 것은 무엇일까? 바로 ‘아름다움’이다. 오징어 게임장의 ‘합목적적’ 아름다움, 즉 일종의 숭고미(崇高美)이다. 이 모든 것을 압축해서 표현하고 있는 씬이 바로 1화에 나온다. 아래 동영상이다. 나는 이 씬이 오징어 게임의 백미(白眉)라고 본다. 처음 볼 때는 모르지만, <오징어 게임>을 다 보고 난 뒤 다시 보면 분명히 보인다.

오징어 게임장의 숭고미는 ‘아이러니’를 통해 구체화된다. 피가 난무하고 사람들이 무서워하며 죽어나가면 나갈수록 오징어 게임장의 이데아는 더욱 뚜렷하게 강림한다. 이 난장판 한복판에 아이처럼 기뻐하며 순수하게 그 짜릿함을 즐기는 오일남이 놀고 있다. 오징어 게임장 바깥 현실의 논리와 윤리와 규범으로 보자면 ‘결코 참일 수 없는’ 현실이 오히려 오징어 게임의 참됨을 뒷받침하고 강화해준다. 황인호는 재즈를 들으며 위스키를 마시면서 커다란 모니터를 통해 이 현실을 마주한다. 이 현실에 등장하는 모든 것은 이제 모니터 위에서 평평해져 있다. 거기서 시간은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테레비 보고 식고 자면 끝나는, 게임에 필요 없는 잡동사니가 가득한 ‘하루’가 아니라, 모니터처럼 직사각형인 디지털 타이머에서 빛나는 게임만의 시간, ‘순수해진 남은 시간’이다. 참가자들의 피는 모니터 위의 픽셀들로, 그들의 비명은 빵빵한 음향 시스템의 효과음으로 순수하게 ‘맛사지’ 된다. 게임판처럼 얇지만 그러나 넓은 이데아가 쇄도한다. 그는 다른 데서는 가면을 쓴 프론트맨이지만, 오징어 게임의 이데아 앞에서는 가면을 벗은 자가 된다. 오직 로맨티시즘이 지배하는 현실, 인간성조차 이 로맨틱의 땔감이 되는 순수한 현실, 이것이 황인호가 갈망하며 누리는 현실인 것이다. 【황인호가 인간성의 대체물로 이 숭고미를 끌어안은 것인지, 아니면 이 숭고미에 빈틈 없이 매혹되어 인간성조차 버린 것인지는 시리즈 1로만 짐작할 수는 없어 보인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Fly me to the moon’이 배경으로 깔리는데, 이것은 황인호가 모니터를 보면서 직접 플레이시킨 곡이다. 이 곡은 이 씬에서 ‘아이러니한 숭고미’를 200% 표현해내고 있다. 멜로디가 일단 딱 들어맞는다. 그리고 가사는 매우, 매우, 매우 딱 들어맞는다. 일단, 가사를 함 보자. 

Fly me to the moon
Let me play among the stars
And let me see what spring is like
On Jupiter and Mars
In other words, hold my hand
In other words, baby, kiss me

Fill my heart with song
And let me sing forevermore
You are all I long for
All I worship and adore
In other words, please be true
In other words, I love you

아래는 번역이다. 【직접 번역을 해보다가, 장난삼아 구글 번역을 한번 돌려봤는데, 깜짝 놀랐다. ‘Fly me to the moon’을 ‘날 달로 날려줘’라고 뽑아내는 것이었다! 와, 정말 잘된 번역이다. 무슨 ‘나를 달로 보내주오’, 이런 번역(내가 애초에 생각했던 ㅎㅎ)보다 훨씬 낫다. 라임도 딱딱 맞고, 희한하게도 곡의 분위기에 더 어울리는 표현들을 뽑아낸다. 인공지능을 무시하면 안 되겠다. ㅎㅎ 그래서 구글 번역을 채택하고 단어 몇 개만 손 봤다.】

날 달로 날려줘
별들 사이에서 놀게 해줘
그리고 봄이 어떤지 보자,
목성과 화성에서
다른 말로 하면, 내 손을 잡아줘
다른 말로 하면, 자기야, 키스해줘

내 마음을 노래로 채워줘
그리고 영원히 노래하게 해줘
넌 내가 갈망하는 모든 것
내가 경배하고 숭배하는 모든 것
다른 말로 하면, 제발 진실해줘
다른 말로 하면, 사랑해

고전논리학에 보면 명제의 속성 중 ‘후건이 참이면 전건의 진리치에 관계없이 조건문은 항상 참이다’라는 것이 있다. 조금 더 줄이면, ‘후건이 참인 명제는 항진명제(恒眞命題, tautology)’이다. 이걸 자연어로 바꾸면 매우 기괴한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내일 해가 동쪽에서 뜨면 나는 사람이다.”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면 나는 사람이다.” 이 두 명제는 모두 참인데, 후건인 ‘나는 사람이다’가 참이기 때문이다. 후건이 참이면 해가 동쪽에서 뜨든, 서쪽에서 뜨든 진리치는 바뀌지 않는다. 자연어로는 매우 이상하지만 말이다. 내 개인적으로 이건 ‘광기’와 ‘로맨티시즘’의 논리를 설명하는 데 잘 들어맞는다고 본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광기와 로맨티시즘의 논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롱과 귀여움도 이 논리로 잘 설명이 된다. 예를 들면, 우리 세대 경상도 사람들이 논쟁하다가 잘 안 되면 마지막에 ‘그래, 니 똥 굵다!’ 이렇게 끝을 낸다. ‘니 똥 굵다’를 ‘참’인 후건으로 삼아버리면^^ 앞에 나온 내용의 진리치와 관계없이 전체가 니 똥 굵은 사태가 참임을 뒷받침하는 전제가 되어버린다. ㅎㅎ 그리고 아기가 ‘아무 말 대잔치’를 해도 아기의 모든 말은 ‘아기는 귀엽다’가 참임을 뒷받침하는 전제가 된다. 조롱과 귀여움 역시 로맨티시즘(‘재미가 이긴다!’)과 광기(‘귀여워 미치겠다!’)의 영역에 속해있다.】

시나트라의 위 곡이 바로 이 논리를 전형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자연어이기 때문에 해석하는 사람의 주관에 달려있긴 하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다. 그 근거를 이제 이야기해보겠다.】 연인을 달로 날려주고 별들 사이에서 놀게 해줄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1절의 ‘다른 말로 하면[In other words]’ 이전까지의 모든 내용은 사실은 ‘거짓’이다. 참이 아니다. 그러나 그(녀)가 내 손을 잡아 주는 것, 키스해주는 것이 이루어진다면, 즉, ‘참’이 된다면 앞의 내용이 참이 아니라 하더라도 현실 전체는 ‘참’이 된다. 그러므로 앞의 내용이 더 거짓이면 거짓일수록 뒤의 참된 현실의 참됨은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일종의 아이러니인 것이다. 여기서 In other words는 그리스어 tauto와 같은 뜻인데, ‘후건이 참인 항진명제[tautology]’를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다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2절은 ‘전건, 후건이 모두 참인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남자라면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같은. 이러한 명제는 언제나 참이다. 위 곡이 2절만 있었다면 매우 밋밋한 곡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절이 먼저 나옴으로써, 2절은 1절의 아이러니한 로맨티시즘을 강화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 곡의 최종적인 진실(true)은 무엇인가? 바로 ‘사랑해![I love you!]’이다.

프론트맨 황인호의 ‘진실’은 오징어 게임장 그 자체였다. 동그라미, 세모, 네모의 오징어 게임의 형상은 서로를 보완하고 채워주며 지탱하는, 그 자체로 빈틈 없이 완벽한 현실이다. 그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숭고미가 그에게는 ‘I love you!’에 해당된다. 인간성이 사라진, 아니 사라지고 있는 오징어 게임장은 숨막히게 아름답고, 이 아름다움은 그가 부여잡고 있는 진실을 더욱 참되게 한다. 바로 거기가 그가 접붙어 있는 곳, 그의 일생(一生)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인간성은 참가자들이라는 아바타 안에 농축되어 있다. 아바타가 하나씩 사라질(=죽을) 때마다 인간성의 총량도 줄어든다. 결국 최후에는 온전히 짜릿함과 재미의 아바타가 된 1인만이 남는다(오징어 게임의 구조 상 한 사람 이상일 수도 있으나 ‘짜릿함의 동력’이 그렇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그의 존재는 참가자들 모두의 인간성과 교환된 화폐, 목숨값, ‘빚’이다. 여기서 오징어 게임의 숭고미는 절정에 이른다.】
【오일남은 죽었다. 혹시라도 VIP들이 변심하거나 망해서 오징어 게임 상금이 고갈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오징어 게임은 소멸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황인호는 쓰지 않고 남겨둔 자기 상금을 걸고(‘개평’인 동시에 ‘오링’) 오징어 게임을 개최할 것이며, 이 마지막 게임을 하고는 자살할 것이다. 이는 자기 목숨(일생)을 주고 새로운 ‘프론트맨’의 자리를 마련하는 행위이다. 그로서는 새로운 게임 승자가 그의 뒤를 이어 순수하고 숭고한 게임의 이데아를 계승하기를 바랄 것이다. 이게 가능만 하다면, 황인호의 우승 상금은 영원한 게임의 이데아를 위한 최고선(最高善)이 된다. 영원히 오징어 게임 안에 머물며 영원히 프론트맨의 자리를 보장하게 된다.】

* * *

이 드라마의 진정한 ‘짜릿함’은, 그리고 무서움은 이게 ‘모니터’로 보는 ‘드라마’이기 때문에 시청자를 자동적으로 황인호의 자리에 앉게 한다는 점이다. 드라마 속에서 황인호는 공권력에 잡히면 최소 무기징역을 선고 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저 자리에 앉아있지만, 드라마를 보는 우리는 그런 위험 없이 모니터를 볼 수 있다. 드라마를 보고 재미와 미적인 쾌감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이미 황인호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다. 나는 <오징어 게임> 인기의 요체(要諦)가 바로 시청자들을 프론트맨(=모니터 ‘앞에 [앉아]있는 사람’) 황인호의 시선에서 오징어 게임을 보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달로 날려준’ 것이다.

후속글


  1. 사실, 이 글에서 ‘이데아’라고 표현한 것은 플라톤의 입장에서는 ‘시(詩, poiema, 만들어진 것)’에 가까운 것이다. 알다시피 플라톤은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그 이유를 플라톤이 시가 이데아의 지위를 위협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결국 현실도 무너지게 된다. 이 글 그리고 이 글을 보라. 공교로운 것은 <오징어 게임>이 진짜 존재한다면 ‘플라톤의 두려움’이 현실화된 예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