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글
요즘 한국에서 한 두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잘나가는(?) 사랑의교회의 건축 문제로 인터넷 교계 뉴스사이트마다 떠들썩하다. 최근에 이슈가 된 ‘메가처치 공박’과 맞물려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단, 건축비가 2000억 원이 넘는다고 하니 그 교회, 아니 그 교회 교인들의 재정적 부담이 클 것이라는 짐작은 쉽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부지 매입 등의 절차를 공동의회에 보고는 하겠지만 찬반은 묻지 않겠다고 한다. 이 정도까지만 이야기해도 비판할 거리들은 많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들은 실은 많은 교회들이 자주 받고 있는 비판들이다. 그리고 현실과는 별도로, 원칙적으로는 개선의 여지가 있다. 그런데 교회의 행태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이 대두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11월 23일 기자간담회의 내용을 근거로 할 때, 이번 건축 결정을 통해 사랑의교회는 ‘분립 개척’이라는, 대형화를 나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선택을 외면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기자간담회에서 사랑의교회는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그런데 이러한 옹호의 구체적인 내용 중, 최근 미국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의 메가처치 옹호(미주 뉴스엔조이 11월 24일 기사, 릭 워렌 목사, “메가처치가 교인들 요구 더 잘 채운다”)와 비교할 때,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릭 워렌 목사는 메가처치의 정의(定義)에 충실하게 ‘교인들 요구’를 중심으로 메가처치를 옹호한다. 교인들의 종교적 요구가 전면에 등장하고 이른바 ‘교회의 사회적 기여에 대한 요구’는 전자에 포함되는 많은 것들(그러나 주요한 축을 이루는) 중 하나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사랑의교회 측은 “가진 자, 기득권층을 변화”시키는 것, “강남을 변화”시키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으며 이 ‘변혁사역’을 위해 대형교회가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워렌 목사 식의 접근 방식은 ‘교인들’을 전면에 두는 수사(修辭)를 펼친다. 그는 우리나라의 대형교회들 역시 새들백교회 같은 메가처치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우리나라 대형교회들이 워렌 목사의 수사에 동의할까? 워렌 목사가 예를 든 여의도순복음교회가 과연 ‘우리 교회는 교인들의 다양한 요구를 위한 맞춤형 교회입니다’라고 흔쾌히 스스로를 소개할 수 있을까? 사랑의교회가 ‘우리는 강남에 거주하는 교인들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그것을 적극 추진하고 있습니다’고 말하고 있는가?
오히려 강남에 거주하는 기득권층을 ‘변화’시킨다는 수사를 쓰고 있다. 릭 워렌이 이해하는 메가처치는 ‘교회-공급자, 교인들-수요자’라는 영업적(營業的) 구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강남에 거주하는 기득권층을 변화시킨다’는 수사는 이러한 영업적 구도에 들어맞지 않는다. 이 수사에서 등장하는 ‘변화’라는 말은 ‘요구 충족’과 수사적으로는 상극이라 할 수 있다. 교회를 주체로 둘 때, ‘변화’는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혁적’ 틀은 영업과는 거리가 있다.1)
‘강남에 거주하는 기득권층을 변화시킨다’는 수사에는 일단 ‘교회=교인들’임을 전제되어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전제 위에서 이 수사는 ‘교회가’ 강남에 거주하는 기득권층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러면 ‘강남에 거주하는 기득권층’은 사랑의교회 교인들에게 타자화된다. 현실에서 이들이 강남에 거주하는 기득권층인지 아닌지와는 별개로. 그러므로 ‘메가처치’와, 기자간담회에서 사랑의교회 측에서 말하는 ‘대형교회’는 사실 수사적으로 다른 별개의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항간에 ‘새들백교회 한국 지점은 사랑의교회’라는 풍설(風說)이 돌 만큼 현실에서는 사랑의교회가 여러 가지 면에서 메가처치인 새들백교회와 유사하게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함에도, 양자의 현상(現象)이 유사한 것이 양자의 ‘수사적’ 본질이 같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수사(修辭)는 항상 ‘논거창고(論據倉庫)’, 즉 ‘논고(論庫, locus/τοπος, 안재원의 변역을 따름)’를 필요로 한다. 수사적으로 스스로의 본질을 규정할 때, 청중에게 긍정적으로 접수될 수 있는 말들이 들어있는 논고가 선택된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수사적 본질 규정은 전통적, 혹은 문화적, 혹은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다. 사랑의교회가 택한 논고는, 메가처치가 택하는 ‘영업’이라는 논고와는 다르게, ‘변혁’이다. 이러한 논고는 한국 사회에서 소위 ‘개혁적’ 내지는 ‘진보적’이라고 수사되는 그룹이 주로 사용하는 논고다. 이 논고의 기독교 칸에는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무리다’, ‘교회는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고 세상의 불의와 악에 저항하는 무리다’ 등의 말들이 들어있다.
따라서 사랑의교회는 스스로를 개혁적 내지는 진보적 실체로 규정하고자 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수사적 본질 규정에 동의한다면 문제는 없으나, 현실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교회를 비판하고 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개혁적 내지는 진보적이라 수사되는 부류다. 이들은 ‘영업’이라는 논고를 택하여 사랑의교회의 수사적 본질을 규정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은, 사랑의교회가 ‘변혁’으로도, ‘영업’으로도 규정될 수 있는 공통논고[locus communis]이다. 이 공통논고는 바로 ‘자본’이다. 변혁을 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며, 영업을 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다. ‘대형교회’를 수사적으로 규정할 때 가장 보편적인 논고는 바로 ‘자본’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형교회를 가장 급진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교회에는 돈이 필요 없다’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한 단계 밑으로 내려가서 ‘변혁하는 데는 돈이 필요 없다’라고 비판한다면 사랑의교회의 수사적 본질 규정을 가장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변혁하는 데 돈이 필요 없다고 할 경우, ‘변혁’이라는 논고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 논고가 터하고 있는 현실, 특별히 한국 현실은 변혁조차 자본에 포섭되어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영업’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변혁’이라도 ‘후원금’조차 끊기면 그 존립 기반 자체가 흔들린다. 나는 기독교의 가장 공통논고인 성경을 볼 때, 과연 교회를 변혁이나 영업 등의 논고로 본질을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심히 회의적이다. 교인들이 예수를 제대로 믿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사회를 변혁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에 들어가는가? 이것이 성경에서 도출될 수 있는가? 교회 내부적으로 필요한 자금 외의 돈을 외적인 사업(이것이 교회의 이익을 위한 것이든 공익을 지향하는 것이든 간에)에 쓰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성경’이라는 논고를 단일한 논고로 보지 않거나 다른 논고에 편입시키는 것이 대세인 작금의 현실에서 이러한 질문 자체가 무의미할 수 있다. 이러한 해체 작업은 항상 해체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근원적 지점, 다시 말하면 해체자 나름의 보편논고들을 전제한다. [물론 순수하게 ‘해체’의 지위에 머무르려는 욕망을 가진 자들은 수사적 작업을 통해 스스로의 보편논고를 숨기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해체될 수 없는 단위로 생각되는 것들 중 많은 수가 시공 안에서 명멸해왔고 명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대형교회든, 메가처치든 나는 반대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거야 내가 뭐라 할 수 있겠냐 마는, 개인적으로는 절대 반대다.
이 글도 보라.
- 미국이야 영업적 마인드가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온 사회이기에 워렌과 같은 수사가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지 몰라도 우리나라는 영업적 마인드가 전통적으로 그렇게 높이 평가를 받지 않았고, 특별히 정신적 영역에서 영업을 말하는 것이 (현실이야 어떻든) 문화적으로는 일종의 금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