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05, 2011

김상봉 교수님 인터뷰 보고 든 이런 저런 생각들

인터뷰 1 거리에서 만나는 철학자 김상봉 교수를 만나다
인터뷰 2 거리에서 만나는 철학자 김상봉 교수를 만나다 2

김상봉 교수님. 필력이 대단한 분이기에 그의 글들을 많이 읽었었다. 나는 여전히 이분을 철학자로는 존경한다.

하지만, 복음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이분의 이야기에 동의할 수가 없다. 김교수님께서 민중신학을 비판하는 입각점이 철학과 신학, 종교와 복음 사이에도 동일하게 해당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교수님은 철학과 신학을 ‘영원에 대한 갈망’이라는 개념으로 함께 묶으신다. 물론, 이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적어도 기독교 신학의 존재는 기본적으로 성경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중심으로 주석한 것이 신약성경이고 교부 이후 모든 신학은 신약 기자들의 해석지평을 넘어설 수 없는 존재적 한계가 있는 것이다. 복음이든 신학이든 출발은 영원에 대한 갈망일 수 있다. 인간 실존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이 제시하는 세계로 구체적으로 진입해 들어갈 때, 내가 갈망하는 영원을 그대로 둔다면 나는 반드시 우상숭배자가 된다. 모든 형상을 부수고 오직 그리스도라는 형상만 세우는 게 복음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그리스도조차 종교적 덕목과 세상의 온갖 선하고 의로운 것들로 채워 넣는 게 호모 렐리기오수스의 전략이고 또 성경에 이것조차 예언되어 있기에 그리스도라는 형상도 부숴가면서 지내야 하긴 한다. 어쨌든 기본적 구도는 그러하다. 복음을 안다 하더라도 세상의 법과 선과 의를 잘 준수하며 살아야 한다. 복음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의 좋고 선한 것들을 그리스도 안에다 우겨 넣는 것은 그리스도 거푸집 우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상은 항상 ‘보편적’이다. 하지만, 복음은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세계요, ‘그리스도 안에 매인 바’ 된 세상이다. 신학을 철학적 보편성을 근거로 정립한다면, 굳이 신학은 존립할 의의가 없다.

또, 나는 보편적 진선미(眞善美)를 가지고 모든 실증종교를 일원적으로 보는 종교다원주의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이건 단순히 기독교의 유일성을 근거로 하는 반대가 아니다.

종교다원주의의 근거는 언어라는 거푸집의 동일성이다. 모든 실증종교는 어차피 똑같은 단어들과 개념들을 사용하여 전개되기 마련이다. 위상적 지위로 따진다면 ‘부처님=예수님’, ‘무상정등각=복음’일 것이다. 이 밖에도 숱한 개념들과 단어들이 비슷한 위상을 가진다. 천국=극락정토 등등.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실증종교들이 궁극적으로 같은 진리를 말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각 실증종교들이 제시하는 진리의 세계들은 자기들 안에서는 모두 진선미의 영역에 위치한다. 그러나 그 세계들이 모두 진선미로 일컬어진다는 것에서 그 세계들이 궁극적으로 같은 실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계곡에는 많은 길들이 있다. 길이 다르면 결국 다른 산으로 가기 마련이다. 각각의 산은 모두 ‘산’으로 불리겠지만, 같은 산들은 아닌 것이다.

예수는 하늘나라가 땅 위에 임하도록 해 달라는 기도를 가르쳤으나, 이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할 수 있는지 그 길을 보여 주지는 않았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을 끊임없이 쇄신하는 활력과 생명의 원리가 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오늘날 속절없이 현실의 논리에 포섭돼 버리고, 길을 잃고 있고 있는 것이 기독교의 현실이죠. 이런 점에서 저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늘나라를 보여 줄 수 있는 새로운 계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작년에 5․18을 두고 온전한 공동체로서 하늘나라의 계시라고 해석하는 글을 쓴 것은 그런 문제의식의 소산이었습니다. 예수나 부처를 통해 계시되지 않았던 하늘나라가 5․18을 통해 계시되었다고 본 거지요.

여기서 보면, 김교수님은 하늘나라를 중심으로 예수님과 부처님을 회통시키고 있다. 여기에 전제되어 있는 것은 예수님과 부처님이 결국 같은 말을 한 것이고 같은 진리의 세계를 계시하셨다는 생각이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과 부처님의 하늘나라를 5.18과도 동일시할 수 있다. 여기서 하늘나라라는 ‘활력과 생명이 충만한 세계’라고 정의해볼 수 있다. 이것은 조금 추상화시키면 ‘좋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예수님이든 부처님이든 모든 실증종교는 좋은 세상 만들자는 것이라는 생각이 여기에 깔려있다. 이것을 근거로 실증종교 간 차이는 무화된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함석헌 선생의 작업이 바로 동서양을 회통시킨 작업이다. 회통은 보편성을 지향한다. 김교수님이 함석헌 선생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이런 면에서 이해가 되긴 한다. 하지만, 회통도 경계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원효 대사가 했던 작업은 불교 내부의 작업이지, 다른 종교를 포괄하는 작업은 아니었다. 육사외도(六師外道)는 여전히 외도일 뿐이지 회통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함수적 사고는 종교의 영역에서는 가능은 하되 적실하지는 않다.

개인적으로 종교간 대화는 가능은 하겠지만, 사이좋게 지내는 분위기를 도모하는 것 이상의 실익은 없다고 본다. 여호와 하나님은 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중생일 뿐이다. 게다가 중생 중에서도 지은 업이 가장 큰 동시에, 해탈이나 열반이 불가능한 중생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 4:8, 16). 여호와 하나님이 해탈한다면 우주는 無로 돌아갈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해탈 내지는 열반할 일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 바로 ‘하나님의 미쁘심’(롬 3:3, 고전 1:9, 10:13, 고후 1:18, 그외 다수 구절들)이다. 한편, 부처님의 깨달음을 표현하는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는 말을 함 보자. 부처님 깨달음의 절대성에 대한 확신, 부처님 깨달음이 다른 어떤 깨달음이나 가르침보다 높다는 단언이 없이는 불교는 성립할 수 없다. 그러나 부처님은 복음의 입장에서 보면 죄 중에 잉태되어 자기 죄 가운데 살다가 흙으로 돌아간 존재다. 무상정등각으로 관(觀)한 세계는 복음의 입장에서는 흙, 육신일 뿐이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일 뿐이기에.

자기 종교의 고유한 입각점들을 포기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은 자기 종교를 침해하거나 모독하는 일일뿐더러, 상대방 종교를 오독하고 오해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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