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전 3: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위 구절은 바울이 감독의 직분의 요건을 설명하면서 나오는 내용 중 하나다. ‘자기 집’과 ‘하나님의 교회’가 등치를 이루고 있음이 뚜렷하다. 이 말인즉슨, 하나님의 교회 역시 일종의 ‘집’임을 의미한다. 또, 하나님의 집(교회)를 다스리는 일은 자기 집을 다스리는 일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가지 집이 전혀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똑같이 ‘집’이라는 말로 함께 불릴 수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므로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집 역시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은 일종의 유비의 논리, 즉 ‘하물며’와 ‘어찌’의 논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논리가 아니다. 자기 집을 다스리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는 잘 돌볼 것이다, 이런 말은 바울에게 성립되지 않는다. 나는 여기서 그리스도인 윤리의 단초를 본다(‘윤리’라 불릴 수 있다면).
복음은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말’이다. 성경은 더 나아가서, 창조조차 ‘말’의 차원에 둔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복음은, 물론 역사상 일어난 일들을 전제하고 있지만 그 최종적인 심급은 어쨌든 ‘말’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언행은 ‘~복음’이라는 글월로 우리에게 남아있고, 사도들의 행적 역시 ‘사도행전’이라는 보고서로 우리 손에 들려 있다. 또, 처음 교회들의 사정은 바울 사도에 의해 기록된 ‘~에 보낸 편지’라는 서신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머지 신약성경들 역시 상황이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이 역사의 궁극적 심급을 반영하는가? 그렇지 않다. 신약성경 역시 구약성경이라는 글월을 깔고 시작한다.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시대에 구약성경은 이미 아득한 옛날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문집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구약성경에 따르면, 이러한 ‘말’의 연쇄의 시원(始原)이자 종결(終結)은 바로 하나님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러한 내용은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하고 또 많은 이야기로 확장되겠지만, 가장 근원적인 사태는 복음을 전하고 전달받는 것은 ‘말’을 통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에 적힌 단어 중 (문헌학적 난제들은 일단 차치하자) 인간 세상에서 쓰이지 않는 단어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복음은, 도식화하자면, ‘성경에서 쓰인 말들 + α’를 가지고 소통된다. 또한 복음은, 소통하는 인격 자체에 흡수됨 없는 정보들과는 달리 사람 안으로 들어간다. 예를 들어, 복음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의’를 말한다면, 그저 자기 밖에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기에게 작용한, 더 나아가서는 자기에게 들어온 하나님의 의를 말할 수밖에 없다. 복음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말들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시편 78편은 이러한 사정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아삽이 노래하고 있는 ‘옛날’ 일들은 그저 아삽 밖에서 일어난 일들이 아니다.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그리스도인은 ‘전도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전도하는 데에 쓰이는 말들을 배반한다면 그의 전도는 성립할 수 없다. 더 나아가서, 그의 그리스도인됨조차 흔들릴 수 있다. 하나님의 의를 말하면서 ‘어찌’ 불의를 일상적으로 행하고 살겠는가. 육신의 아버지를 공경한다면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선포하는 사람이 ‘어찌’ 속된 삶을 살겠는가. 그리스도의 신부라면 ‘하물며’ 창기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어찌’와 ‘하물며’는 개인 차원뿐 아니라 ‘공동체적’, 더 나아가서는 ‘사회적’ 차원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할 것은, 그러함에도 근본적인 것은 ‘복음’이라는 사실이다. ‘어찌’와 ‘하물며’를 폐하고 ‘~ 중 하나’를 취한다면 ‘하나님의 교회’, ‘복음’이라는, 궁극적 이름들이 무너진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의 의와 평화를 구현하는 제도 ‘중 하나’다, 복음은 세상의 훌륭한 언설 ‘중 하나’다, 성경이 말하는 선악은 세상이 말하는 선악 ‘중 하나’다, 등등. 결국 성경의 하나님은 세상의 신들 '중 하나'가 된다. 복음이 ‘소통’되지 않고 ‘해소’될 때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