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윤리와 법은 기본적으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논리 위에 있다. '순수 선(純粹善)'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 실존 자체가 악(惡)이지 않은가. 아니, 자연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타자를 잡아먹지 않고는 굴러갈 수 없지 않은가.1) 살려는 움직임 하나조차 타자를 해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 그 상태 자체로 본다면 그저 악이요, 죄일 뿐이다. 선과 의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로맨스'의 영역을 계속 개발하고 또 개발해왔다.
이러한 상황은 규모가 아주 큰 사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두 세 사람이 모여 모종의 '모임' 내지는 '사회'가 형성되기만 해도 벌써 '잡아먹는', 즉 '나를 세우는' 투쟁이 시작된다. 동물들을 보라. 러시아에서 어미 그리즐리가 십대 여성을 자기 새끼들 먹이로 주었다는 사고를 들었을 때 우리는 끔찍하게 생각하며 그 그리즐리를 찾아가서 반드시 죽인다. 하지만, 그리즐리 입장에서 보면 자기 새끼들을 살리려는 애틋한 마음이 발로가 되어 행한 일일 뿐이다. 생명을 위하는 어미의 마음이 다른 어미에게는 악몽이 되어버리는 이 현실. 이것이 '근본 현실'이다. 러시아 정교회, 중세 기독교 혹은 이슬람이 이념의 바탕으로 등장하는 전쟁 영화들을 보면 이런 것이 잘 드러난다. 자기 조국이, 그리고 자기 아들들이 승리자가 되어 돌아오는 것을 간절히 기다리는 어머니의 숭고한 기도는 한편으로 적국의 아들들이 몰살당하고 노예로 팔려가는 것을 기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태는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악'이 아니라 '불가피'일 뿐이다. 생명조차 현실에서는 여러 모로 경중을 따져 선택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 자체를 로맨스의 공간으로 만들려는 시도하는 것은 허망할 뿐이다. 잡아먹는 상황 자체가 세상의 생명이요, 힘이기 때문이다. 윤리나 법은 모두 이를 전제하고 정해진다. 잡아먹지 않으면 죽음만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라고 하신 말씀은 세상을 통째로 바꾸라는 의미이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무리'라도 '잡아먹지 않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사회로 바꾸라는 뜻이 함의되어있다.2) '증인'은 두 세 사람으로 성립되는데, 증인이 성립시킨 증언은 하나의 현실,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담고 있다.
하나님 역시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르되 일단 '말을 하려면' 위의 현실에 맞추어 말씀하셔야 한다. 안 그러면 말을 하나 안 하나 다를 것이 없게 된다. 구약성경을 보면 당대 고대 여느 윤리적 감성과 별로 다르지 않은 이야기들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인간의 적나라한 현실이 거기에 그대로 드러나 있고 이 현실을 통해 무언가를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말씀의 결론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독생자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 긍휼을 말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회피할 수 없음이 이제 밝히 계시되었다.
따라서 십자가 없이 선한 것, 의로운 것을 말하는 모든 말은 그저 하나의 위안거리 내지는 놀 재료일 뿐이다. 차라리 결론을 '침묵'으로 내리는 것이 더 낫다. 깊은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이 더 낫다. 그렇지 않고는 그저 유토피아를 제시하는 것, 더 나아가서는 수많은 율법 및 시스템, 제어 체계 중 하나에 속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