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7, 2019

그리스도인의 윤리: ‘닮음’과 ‘하물며’

그리스도인에게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윤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조차 문자를 건드리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도구로 화한 것을 아는 사람이다. 이른바 문자의 완결성, 내용의 선함 등은 사람을 진정한 의미에서 ‘윤리적’인 존재로 만들어주지 못한다. 랍비 엘리에셀이 말하는 것처럼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내 스승으로부터 배운 율법의 모든 것을 적을 수 없다’라는 기조는 그리스도인의 것이 될 수 없다. 배울 것이 남아있다는 것은 완결성이 없음을 말한다. 율법에다 미완의 책임을 지우지 않고 사람 쪽에다 지운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실상, 이 둘은 잘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율법에다 미완의 책임을 미루지 않는 사람들도 결국 ‘문자들’을 생산하는 스승들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세율법을 ‘닫는’ 분이시다. 율법의 완결이시다. 따라서 율법은 더 이상 열려있지 않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기름 부으심은 율법을 열어두는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닫으시는 영이다. 문자대로 본다면 율법은 성전과 제사의 시행으로 완결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성전과 제사조차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임이, 선지자의 말들 중 하나임이 밝히 드러났다.

결국 윤리라는 것은 ‘나타나야’한다. 그러하기에 그 근본을 인간의 마음 내지는 결단력에 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양심이라 불리는 어떤 것이 바로 이를 가리키고 있다. 세속적인 윤리는 개인의 자기 존엄에 터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개인의 자기 존엄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임의 룰(그러므로 하찮다, 이런 의미가 아니다. 게임의 룰도 중요하다)은 될지언정, ‘절대적’ 근거는 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윤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닮음’에 터하고 있다. 하나님을 닮음, 그리스도를 닮음.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닮아있다, 아니, 닮아야 한다. 닮음은 단지 서술적인 차원이 아니라 당위의 차원, 필연의 차원으로 고양된다. 그러하기에 ‘하물며’를 말할 수 있으며, 이는 본격적인 윤리의 영역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닮음은 항상 꾸며낼 수 있다. 결국 보이는 것은 ‘외모’일 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