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짜, 일어나보니 꿈이라서 너무 다행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 꿈을 거의 꾸지 않는데, 이번에는 깨고 나서 옆에 자는 아내를 확인하고 정말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슨 꿈이었길래? 군대 재입대하는 꿈이었다.😨
물론, 여느 군필 예비역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가끔 언필칭 ‘재입대 꿈’이라고 불리는 꿈을 꾸는데, 보통은 전후 과정 생략하고 내무반에 앉아 있거나, 훈련받고 있거나 이런 장면이 바로 등장한다. 그러면 어떤 때는 심지어, 꿈에서 ‘아, 이거 꿈이겠네 ㅎㅎ’ 이렇게 알아차릴 때도 있다. 그리고 잠이 깨도 그저 쓴웃음을 지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이번 꿈은 아주 달랐다. 일단, 병무청 비슷한 데서부터 꿈이 시작되었다. 영장이 나와서 해병대(…)에 재입대하게 되었다. 희한한 게, 훈련소 입소를 생략하고 병무청에서 바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병무청 내 어떤 사무실(?)에 대기하다가 기간병(?)이 와서 이제 자대로 전출될 긴박한 순간이 왔다. 나는 기간병에게 “내가 군 제대한 지가 벌써 20년이 넘었다!”라고 외치면서 강려크하게 항의했다. 기간병은 소심하지만 마음씨 좋아 보이는 청년이었는데, 내 항의에 별 대꾸를 못하고 내 눈치를 살폈다. 그때 사무실에 20대로 보이는 여직원이 있었는데, 나는 그에게 전산으로 확인 좀 해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그런데 이분이 매우 동정심 많고 사려가 깊은 분이어서, 내 사연을 듣고 진심으로 걱정하면서 확인해주었다. 그리고 확인 결과, 정말 내가 이미 제대한 지 오래며, 지금 입영 명령은 잘못된 것이었다.
나는 내 화를 최대치까지 돋워 병무청에 항의했고, 기간병은 슬슬 분위기를 보다가 돌아갔다. 내가 지금 생업(목사가 아니라 자영업하고 있는 것으로 나옴 -_-) 하다가 여기 끌려와서 손해본 금액이 얼마며, 날린 시간이 얼마인지 당신들이 아냐고. 그리고 이 일로 인해 받은 트라우마가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가냐고.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보상할 거냐고.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내 항의의 예봉을 맞은 직원은 아까 나에게 동정심을 갖고 전산 체크를 해주던 바로 그분이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저희가 죄송하게 됐다, 잠깐만 기다려달라, 이런 말을 하고 어디를 갔다 오더니 내게 봉투들을 내밀었다. 보니까 병무청 전 직원에게 일일이 다니며 모금해서(…) 모은 것이었다! 부족하나마 손해 보신 금액 보전(補塡)하시는 데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돌아가시는 여비는 따로 챙겼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내게 봉투들을 건넸다.
나는 험험 거리며 봉투들을 챙겼고, 병무청 밖을 나서니 웬 청년 둘이 걸어가고 있었다. 한 청년은 다리를 절고, 다른 한 청년은 그를 달래며 걷고 있었다. 내가 기다리는 버스 정류장과 같은 데서 버스를 기다리는 내내 다리를 저는 청년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침울해 보였고, 그를 달래는 청년은 매우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지만 간곡하게 친구를 달랬다. 그러나 버스가 도착하니 다리를 저는 친구는 휙 돌아서 저리 가버렸고, 그를 달래던 청년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멀어져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을 뒤로하고 버스를 타려던 찰나, 꿈이 깼다.
비범한 꿈이었다. 그런데 악몽이었다. 내가 악몽이라고 인식한 것은 이 꿈이 내가 경험한 한국을 농축해놓은 것이지만 결코 다시 겪고 싶지 않은 현실이기 때문이리라.
일단, 병무청 사무실은 내가 다니던 중고등학교 교무실과 흡사했다. 한 번씩 교무실에 들를 때는 늘 주눅 들게 만들던 그 권위. 그것은 단지 교사와 교육의 권위만은 아니었다. 훗날 교무실에서 느끼던 그 ‘주눅’을 나는 매우 증폭되고 심화한 모습으로 군대 훈련소에서 겪게 된다. 즉, 나는 학교와 군대, 그리고 병무‘청’으로 대표되는 국가를 무의식적으로 동질적인 집단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것들은 내게 모두 주눅 들게 하는 권위·권력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꿈속 나 역시 누군가를 주눅 들게 하는 주체로 행사하고 있었다. 소심하게 그냥 조직의 체계와 명령에 순응하는 젊은이들, 즉 병무청 여직원, 기간병에게 나는 내 억울한 일을 풀어내는 형식으로 일종의 갑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닌 말로 그들이 잘못 명령된 내 재입대에 무슨 큰 책임이 있겠는가? 그들은 내게 재입대를 명령한 권력이 아니었다. 그러나 군기 세다는 해병대 기간병은 내 눈치를 봤고(아마 그 역시 내 처지에 깊이 공감했을 것이다), 병무청 여직원 역시 나를 진심으로 동정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들의 대처는 권력의 억압과는 거리가 멀었는데도 나는 내 억울함을 젊은(=어린=만만한) 그들에게 풀어냈던 것이다. 기간병은 내가 학교에서 늘 마주치곤 했던 주눅 들고 소심한 내 친구들(뛰어나지도, 당차지도 않던)의 모습이었고, 여직원은 아이들과 교사들 양쪽에 치여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여교생 선생님의 모습이었다.
소심한 기간병과 양쪽에서 치이는 여직원 같이 ‘만만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들(나이가 꼭 어리지 않더라도)이 많으면 많을수록 안 좋은 사회이리라. 내가 한국을 떠나서 산지 이미 십 년이 넘었는데, 강산이 변해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경험하고 회상한 한국은 다리를 저는 사람이 용쓰지 않고 수치를 느끼지 않고는 타고 또 내릴 수 없는 높은 문턱의 버스였다. 함께 타자고 설득하는 사람의 설득에 힘을 실어주지 못하던 사회였다. 그러나 이제는 버스의 문턱이 낮아지고, 휠체어조차 자유롭게 타고 내릴 수 있는 버스가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버스를 타던 그 정류장은 내가 중고등학교 하교할 때 이용하던 그곳이었다. 거기서 이사한 지가 이미 20년에 가까워져 간다. 이제는 모두 좀 더 좋은 동네에서 편하게, 자기 팔 흔들고 살 때도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