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소위 ‘나르시시스트’에 대한 담론이 유행한다. 그런데 성경은 진작에 인간의 본성을 나르시시즘으로1) 규정해 왔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여기에 ‘고집’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헬라어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딱딱함/단단함’인데, 바울 사도는 이것을 ‘회개하지 않는 마음’과 연결한다. 나르시시즘의 고갱이를 ‘자기가 절대로 옳다고 여기는 마음’이라고 한다면, 인간 자체가 나르시시스트적인 면모를 장착하고 있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조차 고집부리고 자기가 옳다고 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게 모든 인간의 현실이다. 이게 인간에 대한 바울 사도, 더 나아가서 성경 일반의 진단이다―“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2~3).” 마태나 마가는 바울 사도와 같은 단어에 ‘마음’을 합친 단어를 자주 쓴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 없음’과 연결된다―“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완악함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막 16:14).”
그런데 인간이 육신 안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이 완악함을 ‘완전히’ 제거할 수가 없다. 만약 이게 가능하다면 구약·신약성경 기자(記者)들이 외친 ‘돌이키라, 회개하라!’라는 호소는 공연(空然)한 것이 되어버린다. 신약성경에서 사도들이 교회에다가 편지를 보내서 권면한 모든 경고와 책망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삶 가운데서 완악함과 고집은 순간순간 튀어나오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항상 스스로 깨어있어야 하고, 형제자매에게 책망받는 데에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자기를 옳다’ 하고, ‘계명에 비추어 자기가 불의하다고 드러난다고 해도 변명, 떠넘김, 뻔뻔함, 무시 등을 통해 그 계명의 정죄를 벗어나려고 하는 고집을 자기 인격의 고갱이로 삼으며, 그것을 근본적으로는 꺾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사는 사람이다. 일정 부분 나르시시스트적인 면모가 없는 사람의 인격은 반드시 고장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완전히 호구 잡힌 삶을 살거나 혹은, 내가 보기에 옳은 것을 옳다 하지도 못하고 틀린 것을 틀렸다 하지도 못하는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옳다!’라고 끝까지 고수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1편에서 나는 성경이 말하는 경건을2)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사는 것이라 규정했는데, 사실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맥락의 연장선이다. 경건은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자기 옳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유지하려는 나르시시스트’라는 견해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유지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이 나르시시스트임을,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조차 절대로 자기 옳음을 꺾지 않는 존재임을 ‘나르시시스트적인’ 고집과 뚝심으로 고수하는 사람이다.3) 그러하기에 인간이 세운 모든 옳음과 의(義)는, 심지어 하나님 율법을 따라 이룬 것이라 하더라도, 나르시시즘의 완악함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음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사람이다.
성경이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할 때 단지 인간의 윤리적 불완전성, 미숙함, 실수 등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자기를 의롭다고 내세우려는 완악함, 항상 자기를 의롭고 선한 자리에만 두려는 고집, 이런 ‘자기 의(義)’가 죄의 뿌리이다.4) 인간이 저지르는 죄악들은 이 뿌리에서 자라나고 맺히는 독(毒)열매이다. ‘내불남불’로 ‘내로남불’을 타파(打破)하고, 하나님 은혜로 ‘참된 로맨스’에만 머물기를 소망하며 기도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이 소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 요즘 통용되는 ‘나르시시즘’이라는 개념에 대한 내 입장을 미리 요약하면, 나르시시즘은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성향이고, 인격의 핵심을 이룬다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자존감이라고 불리는 것과 부정적으로 나르시시즘이라고 불리는 것은 뿌리가 같다. 같은 물질이라도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고 비유해 볼 수 있겠다. ↖︎
- 이러한 접근 방식은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서방 기독교 전통’에 속한다. 라틴어를 쓰던 북아프리카 교회에서 주로 통용되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어거스틴이나 터툴리안 같은 사람들이 대표자이고, 로마가톨릭과 종교개혁 역시 넓게 보면 이 전통에 속한다. 헬라어를 쓰던 동방 기독교 전통은 인간에 대해 좀 더 낙관적으로 접근한다. 나는 서방 전통을 골자로 하되 동방 전통을 참고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
- 기독교 경건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만 그 재료로 삼지 않는다. 인간의 나르시시스트적인 면모와 고집조차 경건의 재료가 된다. 죽음을 죽음으로, 나르시시즘을 나르시시즘으로 무너뜨리고 훼파하는 것이 복음의 처방이다. 첫 사람 아담의 몸과 마음을 그대로 경건의 재료로 사용한다.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몸과 마음으로 오셨고(죄는 없으셨다), 그분이 ‘당한’ 고난과 멸시와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받았다. 추하고 더럽고 악한 것도 하나님은 사용하신다. ↖︎
-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윤리의 뿌리이기도 하다. 윤리와 그것의 실천은 선하고 옳은 것이지만, 윤리가 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나르시시스트들도 이 땅에 출현한다. 성경의 인간 본성론은 윤리를 기준으로 성선(性善), 성악(性惡)을 나누지 않는다. 윤리적으로 흠결 없이 사는 사람조차 자기 의(義)의 정당화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게 성경이 인간을 보는 관점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규정한다. 이는 단지 ‘모든 사람이 윤리적 과오를 범한다’라는 뜻이 아니다. 따라서 성경은 탁월한 윤리나 대의, 명분 등을 건설하고 실천하는 것으로는(≒정치), 인간 내면의 선한 면모를 개발하는 것으로는(≒종교, 수행 등)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인류를 대표하여 이스라엘이 이런 상황을 잘 보여주었다. 구약성경은 이에 대한 보고서다. 나는 혹은 내가 지지하는 그룹은 구약성경의 이스라엘보다 나을 것이라는 생각은, 적어도 성경의 관점으로는, 망상이다(마 23:29~31). ↖︎